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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도둑키스 / 황병승

오선민 2010. 6. 11. 23:13

도둑키스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덮쳤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

뿌리째 흔들렸나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

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 라이터…… 라이터……

 

 

 

                                       —《문학동네》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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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 1970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추계예대 문창과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3년 《파라21》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트랙과 들판의 별』.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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