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도둑키스 / 황병승 본문
도둑키스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덮쳤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
뿌리째 흔들렸나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
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 라이터…… 라이터……
—《문학동네》2010년 여름호
-------------------
황병승 / 1970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추계예대 문창과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3년 《파라21》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트랙과 들판의 별』.
'좋은 시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씨팔!/배한봉 (0) | 2010.07.21 |
---|---|
[스크랩] 세상의 등뼈/ 정끝별 (0) | 2010.07.14 |
[스크랩]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외 2편/ 김충규 (0) | 2010.06.09 |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 강인한 (0) | 2010.06.07 |
[스크랩] [물푸레나무]詩모음/ 황금찬, 이향아, 김명인, 이상국, 안도현, 박정원, 박형권, 김태정, 김참 (0) | 2010.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