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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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시집 <와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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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준다'는 말의 의미가 상스럽게 느껴졌던 건 그 용례가 ‘밑천을 대준다’와 함께 오래전 총각 시절 내 친구가 그의 여자 친구에게 대뜸 ‘함 대달라’고 요구할 때의 그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상스러운 말로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며 삶을 일으켜 세워 사랑의 극점까지 그 의미를 증폭시킨다.
누군가 대준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로 등뼈를 세우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밥’이 되어 ‘사랑한다는 말 대신’ 쓰임으로서 상스러움은 성스러움으로 거듭난다.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마라든지 혹은 어떻게 하리라고 미리 정한 바 없이 좋고 나쁨의 가림도 없이 전부를 들이밀어 대준다는 것. 거룩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나는 너에게 밥이 된다. 거룩한 밥이 된다. ‘밥’ 하고 말하면 이내 말문이 막히고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데, '사랑한다는 말 대신'으로 이보다 더 진한 것은 없으리라. 밥이 생명의 원천이듯 '대주는 것'은 삶을 등뼈처럼 곧추세우고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대준다는 부박한 말 속에 이처럼 크고 깊고 완전한 사랑이 담겨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요리조리 따지고 재고 탐색하고 쭈삣쭈삣 소심한 아웃복서처럼 주위를 뱅뱅 돌기만 하는 세상에서 생의 벼락처럼, 헛헛한 내 가슴팍 안으로 ‘와락’ 안겨올 ‘등뼈’는 없을까. 품이든 돈이든 입술이든 어깨든 한번 대주겠다고 살짝 귀띔하는 거룩한 사랑은 이제 더는 없는 걸까. 그런 걸까.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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