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못 위의 잠 / 나희덕 본문

좋은 시 감상

못 위의 잠 / 나희덕

오선민 2010. 12. 26. 17:04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가로등이 아닌 달빛이 그림자 만들어주는 가로등도 없는 길이구나. 골목이 좁아 귀가하며 손잡은 세 식구의 그림자 벽에 접혔었겠다. 길이 좁아 가족들 대열에 설 수 없는, 아니 설 수 있는 길이라도 차마 같이 서지 못하고 한 걸음 뒤처져서 자식들과 아내 그림자 보며 귀가하는 아비의 마음, 아비의 그림자 쓸쓸하다.

제비들도 사랑방은 아비가 쓰나보다.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 끝내 풀지 않았을 초소, 못 하나. 새끼들 날 때까지 말뚝근무 섰을 제비 한 마리, 서러운 이름 아비.

제비의 삶과 사람의 삶이 닮았구나. 모든 삶은 서로의 삶의 그림자인가.

모든 지상의 그림자는 서정성 가장 짙은 거울이다.

'좋은 시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겹살 / 김기택  (0) 2011.01.05
발 없는 새 / 이제니  (0) 2010.12.26
명태 / 강우식  (0) 2010.12.25
세속사원 / 복효근  (0) 2010.12.22
[스크랩] 越冬/원무현  (0) 2010.12.2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