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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처소 (외 2편) / 천양희 본문

좋은 시 감상

나의 처소 (외 2편) / 천양희

오선민 2011. 1. 14. 04:48

나의 처소 (외 2편)

 

   천양희

 

 

 

말굽소리 사라지고 남은 들길을

옮겨가고 있다

고삐도 없이 안장도 없이

세월 위에 무엇을 얹으려는 듯

오래전 나를 비켜간 풍경을 지우고

말없는 들에 손을 얹어본다

그까짓 잡풀 같은 거 들풀 같은 거

확 잡아채 멀리 던진다

들판이 아니었으면 바람의 내력을 풀지 못했으리

바람이 내게 풍물(風物)하나를 가르치고 갔다

눈앞에 수락야산 동쪽벼랑,

어디가 조금 평평해진 것도 같다

말들은 도무지 정상을 모른다

모서리도 벼랑도 없는 들길에 서서

제 키를 낮춘 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평생 누워있던 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게 아닐까

일어서서 중심을 고집한 게 아닐까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성(聖) 고독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바쳐

예순여섯 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 고백하는 뱃고동 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 소리를 고통 소리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손을 타면 닳게 마련인데

고독만은 그렇지가 않다 영구불변이다

세상에 좋은 고통은 없고

나쁜 고독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공사 중인데

고독은 자기 온몸으로 성전이 된다

 

 

 

 

                    — 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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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대학 3학년 재학 중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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