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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나무가 새를 집어던지는 시간 (외 1편)

오선민 2011. 2. 21. 03:20

나무가 새를 집어던지는 시간 (외 1편)
 
 
          김 륭

 

 


 

   막 학교에서 풀려난 소녀들이 재잘재잘 화장실 거울 속에 숨겨두었던 얼굴들을 꺼내고, 화창한 토요일이 서둘러 그 얼굴을 반으로 나누고,  

 

   랄랄라, 소녀들은 머리 위 구름 속으로, 햇살은 소녀들의 가방 속으로, 가만히 손을 집어넣어 북북 책을 불사르는 시간 

 

   교문 담벼락에 붙어있던 소년 두엇이 퉤퉤, 서로의 그림자에 침을 뱉어주거나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동안  

 

   나무는 하늘로 손을 뻗어 쿠키로 만든 코와 브라보콘 같은 입과 가리비 모양의 눈을 꺼내 소녀들에게 건네고, 바짝 입이 마른 소년들의 머리는 실몽당이로 변하고,

 

   떡볶이집 지나 고물자전거 옆구리에 낀 노인의 걸음걸이로 소녀들을 뒤쫓는 소년들, 햇살 엉킨 머리카락에 꽂혀있던 어제의 빗방울들이 점점 붉어지는 한나절

 

   새로 태어났지만 맘껏 하늘을 날 수 없는 소녀들과 새장을 부술 수 없는 소년들을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줄 수도 없는 나무의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나무가 새를 집어던졌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벌레처럼 잡아 손바닥에 올려놓고 깜짝 놀라기도 하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소녀들의 치마가 펄럭, 소년들의 그림자를 포장하는 시간

 

   새장 같은 소녀들의 얼굴을 들고 소년들은 앞이 잘 안 보인다는 듯 눈을 비벼대고,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녀들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나무가 집어던진 새를 차곡차곡 가방 속에 집어넣은 다음에야 버스에 오르는 한 무리의 소녀들과 소년들이 날갯죽지 부딪칠 때마다 덜컹거리는 하늘, 랄랄라

 

   지붕 위에 구름을 쏟진 말아야지

 

 


                          ―《청소년문학》 2010년 가을호

 

 

 

치약

 

 

   
   오늘은 사랑에 빠졌다는 당신의 달콤한 계단이 되어보기로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욕 대신 꽃을 퍼붓는 배고픈 짐승들의 가래침은 튜브에 담아 무릎 다친 골목의 연고로 사용하기로 한다. 

 

   물간 고등어 한 마리, 달을 뒤집는 저녁 킁킁 비린내를 칫솔로 사용하는 도둑고양이 발톱 하나 숨겨 치약을 쥐약으로 발음할 수 있는 바닥까지, 사랑은 버리고 빠졌다는 말만 남겨 당신의 뿌리까지 키스를 내려보내기로 한다.

 

   입 안 가득 퐁퐁을 떨어뜨린 상큼하고 개운한 얼굴들아 안녕 여기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의 숨막히는 내부, 이미 부패가 시작된 목숨의 복숭아뼈를 껑충 뛰어오른 입술로부터 푹푹 발이 빠지는 분화구

 

   반짝, 창문이라도 달아낼 듯 치통은 걸어다니고 머리칼은 자꾸 넘어지는데 까칠해진 턱수염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이나 댕기는 당신의 아랫도리를 어디 한번 꾸-욱 눌러 짜보기로 한다.

 

 

 


                  ―《시와 반시》 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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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8년《불교문학》신인상. 2007년〈문화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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