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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외 2편) / 김혜수 본문

좋은 시 감상

챔피언 (외 2편) / 김혜수

오선민 2011. 8. 8. 10:40

챔피언 (외 2편)

 

                            김혜수

 

 

한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왕년에 챔피언이었다는 그의 손에

권투 글러브 대신 들려 있는

한 다발의 비누가

세월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비누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세탁해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과거를 팔아

링 밖에서 그는 재기하려 한다

맨 뒷좌석의 여자가 단돈 천원으로

한 번도 챔피언이었던 적 없는

챔피언의 몰락한 과거를 산다

한 번도 그녀 자신이었던 적 없는

자신의 재기를 다짐하듯

그를 다시 본 건 달포 후

한강을 막 건너고 있는 전철 안에서이다

비누 대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세트의 칼

왕년에 전과자였다는 그가

다시 칼을 뽑는다

이 칼로 말하자면

 

 

        봄밤

 

 

몸에도 길이 있다는 건 적막한 일이다

스쳐지나간 손길을 지우며

등나무가 제 몸을 비틀어놓았다

오른쪽으로만 자꾸 구부러지며 차오르는

나선형 줄기 끝에

잎들이 차양처럼 늘어져 있다

한 쌍의 연인이 그 밑으로 숨어들었다

뜨거운 포옹을 슬슬 가려주며

등꽃들만

왼쪽의 텅 빈 정적을 오래 비추어주고 있다

손 하나가 만들어놓은 길 따라

잠이 구부러지는

늦된 봄밤

나무 한켠이 반질반질하다

 

 

          야유회

 

 

대절버스 타고

벽제숯불갈비 지나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 2km⟶

를 지나 납골당 분양합니다를 지나

야유회 간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를 지나

저 뒤에서 흔들어대는 아줌마

자리에 좀 앉아주세요를 지나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던 인형이 느닷없이 멈추어 서듯

눈 깜짝할 새에 컨베이어벨트로 갈아타고

자동문 안으로 사라지는 관광버스

화려한 꽃무늬 커튼 사이로

보일락 말락 흔들어대던

출렁이는 살집 어디 갔나

유리 상자 안에서 약 조제하듯

뼈를 절구에 빻고 있는 하얀 가운을 지나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를 지나

납골당 분양합니다를 지나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 2km⟶를 지나

벽제숯불갈비 지나

나일론 보자기에 싸인 상자

대절버스 타고 어딜까 어딜까

야유회 간다

—시집 『이상한 야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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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 1959년 서울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에 「동시상영」외 3편을, 《문학정신》에 「약속」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404호』『이상한 야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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