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챔피언 (외 2편) / 김혜수 본문
챔피언 (외 2편)
김혜수
한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왕년에 챔피언이었다는 그의 손에
권투 글러브 대신 들려 있는
한 다발의 비누가
세월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비누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세탁해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과거를 팔아
링 밖에서 그는 재기하려 한다
맨 뒷좌석의 여자가 단돈 천원으로
한 번도 챔피언이었던 적 없는
챔피언의 몰락한 과거를 산다
한 번도 그녀 자신이었던 적 없는
자신의 재기를 다짐하듯
그를 다시 본 건 달포 후
한강을 막 건너고 있는 전철 안에서이다
비누 대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세트의 칼
왕년에 전과자였다는 그가
다시 칼을 뽑는다
이 칼로 말하자면
봄밤
몸에도 길이 있다는 건 적막한 일이다
스쳐지나간 손길을 지우며
등나무가 제 몸을 비틀어놓았다
오른쪽으로만 자꾸 구부러지며 차오르는
나선형 줄기 끝에
잎들이 차양처럼 늘어져 있다
한 쌍의 연인이 그 밑으로 숨어들었다
뜨거운 포옹을 슬슬 가려주며
등꽃들만
왼쪽의 텅 빈 정적을 오래 비추어주고 있다
손 하나가 만들어놓은 길 따라
잠이 구부러지는
늦된 봄밤
나무 한켠이 반질반질하다
야유회
대절버스 타고
벽제숯불갈비 지나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 2km⟶
를 지나 납골당 분양합니다를 지나
야유회 간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를 지나
저 뒤에서 흔들어대는 아줌마
자리에 좀 앉아주세요를 지나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던 인형이 느닷없이 멈추어 서듯
눈 깜짝할 새에 컨베이어벨트로 갈아타고
자동문 안으로 사라지는 관광버스
화려한 꽃무늬 커튼 사이로
보일락 말락 흔들어대던
출렁이는 살집 어디 갔나
유리 상자 안에서 약 조제하듯
뼈를 절구에 빻고 있는 하얀 가운을 지나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를 지나
납골당 분양합니다를 지나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 2km⟶를 지나
벽제숯불갈비 지나
나일론 보자기에 싸인 상자
대절버스 타고 어딜까 어딜까
야유회 간다
—시집 『이상한 야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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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 1959년 서울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에 「동시상영」외 3편을, 《문학정신》에 「약속」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404호』『이상한 야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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