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제14회 《문학 • 선》 신인작품 당선작_ 명미 본문
제14회 《문학 • 선》 신인작품 당선작_ 명미
심사위원 : 홍신선, 김윤배
누군가, 나를 해킹한다 (외 4편)
명 미
잠긴 문 앞에서 열쇠를 찾는다 가방을 뒤진다 열쇠는
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본다 막대사탕을 먹고 싶은
다섯 살의 나에게 열 살 된 내가 훔친 사탕을 쥐어준다
갈콤함에 흠씬 취한 내가 이빨 몽땅 빠진 백발노인이
되어 일곱 살 어머니 젖을 빤다 형체가 뭉그러져 물컹
한 내가 아이 뱃속으로 흡수된다 무수히 많은 나를 통
과한다 나는 나를 찾을 수 없다
그에게 지배당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두꺼비에게 강간당하는 여자, 발 모양의 머리를 가진
새, 얼룩말 무늬의 용, 수없이 매듭지고 꼬인 뱀, 수탉
꼬리에 나비 날개의 암소, , , , . 주름진 유리가 확대시키
고 찌그러뜨려 되쏜 형상들과 뒤엉킨다. 필사적으로 들러
붙는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두 눈알을 쟁반 위에 받쳐 들고 있는
내 몸을 뒤덮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바깥세상과 연결된 끈, 그의 숙주인 나를
파괴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
등
한밤중에 눈을 떠 보니 들판 한가운데 있다 바람 속에 있다 겨드랑이에서 덩굴이라도 뻗기를 바라는가 비까지 뿌린다 뼛속까지 푹 젖는다 떨린다 온몸이 경련하며 구역질이 치솟는다
한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작은방의 어둠이 울렁인다 화상으로 발가락이 물갈퀴처럼 붙어버린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가 명치에 걸린다 아버지의 대장암 수술실 앞에서 첫사랑과의 이별을 예감하는 긴 생머리, 하늘이 노랗게 질린다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면 또다시 손목을 그어대는 정신착란의 붉은 해가, 목구멍을,
내일 혹은 모레는 어느 마을의 처마 밑이거나 볕 바른 언덕에서 깨어나기를 바래야 하는 걸까 발끝에서 뿌리가 나오고 손가락에서 새순이 돋아 새들을 불러들이기를 바래야 하는 걸까 지직거리는 거실의 TV를 끄고 방으로 향한다
돌아보기엔 너무 멀고 아득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처럼
툭툭 끊겨 있는 지나온 길들 위에
망설이고 머뭇거렸던 겹겹의 말들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토해내려, 몸을 뒤트는
등이 도처에
그녀를 사랑할 때
그녀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곧은 다리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녀의 몸 속, 그녀만의 공간을 사랑한다
그녀가 그녀를 찾는다
눈빛과 눈빛, 입술과 입술, 배꼽과 배꼽이
포개진다
품속을 파고든다
긴 터널을 건넌다
수만 겹 주름에 둘러싸인 어둠의 방
그 곳에 서서 그녀는
별 몇 점, 달이 지나는 행로, 어른대는 그림자들,
태초에 새겨진 잡풀과 말라 단단해진 씨앗들을 본다
그녀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는 그녀를 쓰다듬는다
더운 입김으로
수상한 파동에, 후끈 달아오른 수액에
꽃씨들이 눈을 뜬다
꽃대를 세운다
꽃봉오리가 움트고 꽃잎이 나온다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
젖혀지면서 움츠러든다
가지 끝에 붙은 꽃잎들이
하나 둘 떨어질 때
그녀는 그녀의 방을 나온다
때로는 씨앗으로 때로는 뿌리로
서로의 안과 밖을 드나드는
그녀
불면, 재생을 꿈꾸며
밤이면 찾아오는 그녀는
꿈으로 날 옭아맨다
그녀는 긴 머리칼로 나의 온몸을 휘감고
산으로 들로 끌고 다니다
공동묘지 한가운데 꽂힌 십자가에 매단다
잔치를 알리는 바람소리
무덤이 열리고
열린 무덤에서 얼굴 없는 시체들이 걸어나와
원을 그리며 춤춘다
하늘로 오르며 빛을 내는 인광
시체 하나씩 다가와
옷을 찢고 몸속 깊이 파고든다
온몸에 돋는 소름
버둥거리는 팔다리
검은 수액을 쏟아 부은 시체들이
무덤 속으로 사라진다
감긴 눈이 뜨인다
시체의 수가 적어질수록
그들에 대한 열망으로 달아오른다
헉헉대는 희열
흠뻑 젖은 공포
죽음을 한껏 베어 문 자궁
문을 닫는다
미사를 알리는 새벽 종소리
하얗게 말라가는 웃음을 흘리며
사라지는 그녀
나는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모은다
문신
골목 끝, 막다른 길에 그 집이 있다
만취한 사내가 휘두르는 혁대에
여인의 몸이 옭매인다
소리로 빠져나가지 못한 비명이
그녀의 어깨 가슴 등 배 팔 다리에
깊고 짙은 얼룩으로 새겨진다
태아처럼 웅크린 그녀
얼룩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든다
몸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피의 흔적을 쫓는다
어둠 속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덫과 올가미를 피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저 거리에서 이 거리로
헤맨다
숨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낸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달려든다
물고, 뜯고, 씹고, , , , , ,
입 안에 식도에 뱃속에 가득 찬
죽어가는 것들의 떨림
피로 온몸을 물들인 그녀가
울부짖는다
하늘에 걸린 검은 달이
산산조각 나 흩어질 때까지
수상한 꿈과 더불어 돌아다니는
그림자로 서성이는
증오나 분노로 자라나
부적 속에 갇힌
————
명미 / 1968년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 • 선》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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