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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손을 두고 왔다 / 조정인 본문

좋은 시 감상

그곳에 손을 두고 왔다 / 조정인

오선민 2011. 8. 18. 19:01

      그곳에 손을 두고 왔다

 

 

                                                                                      조정인

 

 

당신에게서 마술처럼 풍경이 흘러나왔다 창밖, 온몸으로 바람을 읽는

강물의 독법을 말없이 내다보았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흘러들어

꽃나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물빛으로 반짝였다

 

태양 아래 성장한 당신의 언어는 보폭이 크고 잎사귀가 넓어

잎사귀 아래 내 말은 자주 서걱거렸다 운전석과 옆자리 사이

좁힐 수 없는 건너편이 생겼다 영혼이라 불리는 다른 내가

열리지 않는 창틀을 가만가만 흔들었다

 

보자기에서 꽃나무 한 그루가 쏟아졌다 헤어지기 마지막 3초

전, 당신이 흘리듯 놓아버린 내 손이 바퀴에 깔린 3초를 주우며

나무의 살점들을 주우며 파들파들 울었다 (당신이라는) 미량으로도

치명적인 슬픔이 타오르는 다섯줄의 현(絃), 울음의 발현은

악기일까 연주자일까

 

운전석 옆자리에 우는 손을 놓고 돌아와 문밖 허공의 살갗을

오래 어루만졌다 오동나무야, 너 많이 아팠…겠… 무혈의 핏방울을

없는 손바닥에 받아 옷섶에 문질렀다

 

일곱 번 봄이 다녀가는 동안 나무 안에 거주한 맹인 악공

사랑한다, 사랑한다, 종소리를 더듬어

한 채 보랏빛을 빚던

 

 

                         —《문학사상》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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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인 / 1953년 서울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 졸업.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장미의 내용』,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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