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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김수영 탄생 90주년, 다시 읽은 ‘풀’ 본문

시 비평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김수영 탄생 90주년, 다시 읽은 ‘풀’

오선민 2011. 12. 13. 17:12

마침내 풀은 웃었다 [2011.12.12 한겨레21 제889호]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김수영 탄생 90주년, 다시 읽은 ‘풀’

독재에 대한 민초의 저항이란 독법 대신 풀이 품은 절망을 희망으로 변주하는 역설을 발견하다

 

 

  시인 김수영은 1921년 11월27일에 태어났다. 그래서 지난 11월27일은 김수영이 태어난 지 9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가 떠난 지 몇 년이 되었는지를 추념(追念)하며 그의 빈자리를 되새기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일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 제사는 빠뜨려선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생일잔치는 가끔 생략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포털 사이트는 그날 하루 동안 ‘김수영 탄생 90주년’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시 ‘풀’을 메인 화면 브랜드 로고 자리에 올려두었으니 그래도 이것은 참 좋은 일이다. 김수영의 시집이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한 해 두 번 정도는 들춰볼 만하지 않을까.

그 시를 다시 옮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

 

 

  김수영 사후 발표된 유고시 중 하나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접하게 되고, 그래서 김수영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대표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좀더 결정적인 메시지를 좀더 강력하게 실어 나르는 시, 특유의 ‘변주곡’ 스타일이 좀더 역동적으로 구사된 시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정신의 높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각별히 중요한 시인 것은 사실이다. 이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여러 뛰어난 해석들이 제출돼왔는데도 ‘바람’을 독재나 외세의 표상으로, ‘풀’을 그에 맞서는 민초(民草)의 표상으로 간주하는 독법이 여전히 유력하게 통용되는 것 같다. 그렇게 읽으면 이 시는 간단해진다. 시가 간단해지면 독자는 편안해진다. 이를 ‘길들이기’ 독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각자가 달리 읽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다음은 내 연습 결과다.

  이 시는 ‘풀이 눕는다’라는 현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화자의 의식이 세 단계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풀밭에서 보고 있는 현상을 ‘바람이 분다-풀이 눕는다-풀이 운다’로 계열화한다. 바람이 부니까 풀이 눕는 것이다, 바람이 원인이고 풀이 결과라면 풀은 수동적이고 무력하다, 그때 풀은 우는 것처럼 보인다, 라는 화자의 해석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통념(doxa)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1연과 2연 사이에서 화자는 자신의 해석이 혼란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바람이 불고 풀이 어지러이 나부끼는 장면을 보다가 원인과 결과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듯한 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2연에서 인과관계는 역전된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혹은 “바람보다 먼저” 풀은 눕고, 울고, 일어난다. 2연에서 이 세 운동의 위치에너지는 동일하다. ‘권력과 저항’이라는 도식으로 접근하는 관행적 독법은 풀의 세 운동 중 풀이 일어나는 현상에만 과도한 위치에너지를 부여할 뿐, 풀(저항)이 왜 바람(권력)보다 먼저 눕고 우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못한다). 2연의 핵심은 ‘풀’이라는 결과가 ‘바람’이라는 원인보다 ‘먼저-빨리’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시인의 벅찬 발견 속에 있다. 그래서 시인은 1연의 순방향 통념(doxa)을 2연에서 역방향으로 꺾어 역설(para-doxa)을 만든다.

  급기야 3연에서는 인과관계 자체가 소멸된다. 1연에서 풀은 바람보다 늦었지만 2연에서 풀은 바람을 앞섰다. 3연의 핵심 구절에는 이 두 방향이 뒤섞여 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렇게 인과가 해체되면 ‘풀이 운다’라고 생각할 이유는 또 뭐겠는가. 마침내 화자는 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흐린 하늘과 눕는 풀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제 어떤 비관주의도 개입돼 있지 않다. 당대 한국 사회의 후진성에 절망하지 않으려고 고투했던 김수영은 풀에 자신의 절망을 투영했다가 풀로부터 다시 희망을 길어 올린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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