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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도봉근린공원 / 권혁웅

오선민 2012. 1. 25. 17:12

도봉근린공원

 

                                                  권혁웅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막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즈음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열린시학》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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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 1967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1997년 《문예중앙》으로 시 등단.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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