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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파 예술가들이 추구한 상고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 고전소설강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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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파 예술가들이 추구한 상고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 고전소설강독

오선민 2012. 3. 23. 10:27

책머리에

제1부 - 정지용은 왜 불안했는가
●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
1. 머리말
2.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의 관계
3. 정지용의 시에 나타난 '결핍'의 자연관
4. 정지용문학과 청록파문학의 동질성과 이질성
5. 맺음말

● 『문장』에 발표한 정지용 '한적시'의 특징
1. 머리말
2. 정지용 문학의 변모양상
3.『문장』의 전통주의와 정지용의 정경교융의 인식태도
4.『문장』을 통한 지용의 문학활동의 문학사적 의의
5. 맺음말

제2부 - 정지용은 무엇을 지향했는가
● 정지용과 '문장파 근대미술가들'
1. 머리말
2. 근대시문학에서의 '향토적 정조'의 형성과정과 한계
3. 1930년대 미술화단의 흐름과 김용준의 마학론
4. 『문장』에 나타난 정지용과 김용준의 간텍스트성
5. 맺음말

● 한국문화사의 관점에서 본 정지용
1. 정지용 시비 「압천」 - 한일문화교류의 가교
2. 대중가요 「향수」 와 가곡 「고향」 - 불멸의 노래, 불멸의 시인
3. 남북문학사에서의 정지용 - 다시 부활한 지용

제3부 - 정지용은 왜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했는가
● 『문장』과 정지용
1. 머리말
2. 1930~1940년대 시대상과 잡지
3. 『문장』의 지향점과 문화사적 위상
4. 『문장』에 나타난 정지용의 족적
5. 맺음말

제4부 - 북한에서 정지용은 부활했는가
● 북한문학사에서의 정지용
1. 머리말
2. 정지용 시인의 '마지막 행적'으르 둘러싼 논란
3. 『조선대백과사전』에 서술된 정지용
4. 북한문학사에서의 정지용 문학의 평가
5. 맺음말

● 부록
1. 정지용 연보
2. 정지용 시작품 발표 연보
3. 정지용 연구 총목록
4. 정지용 시비 및 책 표지
5. 『문장』잡지 표지화
6. 조풍연의 결혼화첩
7. 정지용 '마지막 행적' 관련 북한 『통일신보』


정지용과 ‘문장파 근대미술가들’

- 근원 김용준을 중심으로

1. 머리말

1) 한국문학사에서의 『문장(文章)』의 위상

(1) 잡지 『문장』의 위상은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높음. 그 이유는 194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도 꺼져가는 한국적 촛불을 지키려고 매달렸기 때문임.

(2) 풍전등화 같은 위기 상황 : 한국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강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폐 간 등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일제의 광포한 탄압

(3)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인문평론』은 총독부의 강요로 한글 사용을 중단했지만 『문장』은 끝까지 한글 편집을 고수하다가 결국 문을 닫음.

2) 당시 『문장』에 대한 부정적 평가

(1) 카프 진영에 속했던 문인들은 『문장』 편집진들이 조선적인 정조를 추구하면서 조선조의 유교적 선비정신을 계승하려는 의고적(擬古的 : 옛것을 본뜨려는)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현실도피적’이고 ‘시대역행적’이며 반민족적 행위라고 혹평을 함.

(2)『문장』 편집진들이 추구하는 전통주의 내지 상고주의(尙古主義, 옛날의 문물이나 사상, 제도 따위를 귀하게 여기는 것) 취향이 1930년대 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요했 던 시국예술의 “향토성을 표출하라”는 것과 상통함.

3) 잡지 『문장』은 근본적으로는 문학지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종합예술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임.

4)『문장』의 주요 편집진

(1)『문장』지의 본질과 성격을 당대 사회에 강하게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편집 주간이자 소설 분야 담당자인 이태준과 표지화와 장정을 맡았던 김용준임.

(2) 시조와 고전 발굴 소개 : 다음으로 가람 이병기가 일제에 맞서 우리글과 우리말을 고집하고 고전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게재한 것은 『문장』의 토대에 민족주의 담론과 전통성의 본질이 자리하고 있음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데 일조함.

(3) 여기에 김용준의 전통 담론과 화풍에 크게 영향을 받은 정지용이 자신의 한적시(閑適 詩, 또는 자연시나 산수시)를 오로지 『문장』을 통해서만 발표함으로써 잡지의 품위와 기품을 배어나가게 하는 데에도 큰 기운을 불어 넣어 줌.

5) 근원(近園) 김용준의 전통론과 활약상 및 그 의의

(1) 김용준의 전통론은 일제의 관변(정부측) 미술가들이 불교 미술의 전통만을 중시하여 당풍(唐風)을 이어받은 통일신라와 불교 미술이 꽃피었던 고려 미술만을 높이 평가하는 식민사관에 용감하게 맞섰음.

(2) 김용준은 조선조 후기의 남종문인화풍을 계승하고 대중화하던 추사, 혜원, 단원, 오원 등의 문인화(文人畵, ,전문적인 직업 화가가 아닌 시인, 학자 등의 사대부 계층 사람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 산수화, 풍속화를 무시하던 풍토에 정면으로 맞섬.

남종화(南宗畵) : 산수화 2대 화풍 중의 하나. 명(明) 말기의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 등이 당나라 선종(禪宗)의 남북분파(南北分派)에 착안해 중국 산수화를 출신성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 2종으로 구분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파(南派)라고도 했다.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남종문인화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약칭으로 남화라고도 한다.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여기적(餘技的, ‘餘技’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취미로 하는 재주나 일)으로 수묵과 옅은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시정적(詩情的)이며 사의적(寫意的, ‘寫意’는 그림에서,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일)인 측면을 중시해서 그린 품격 높은 그림을 일컬으며, 북종화와 대비되는 개념을 지닌다.

(3) 그는 이들의 작품에는 근대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생(寫生,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대로 그리는 일)의 근간이 되는 사실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규명하여 소재주의 중심의 미학관을 ‘정신주의 미학관’으로 돌려 놓는 큰 에폭(epoch, 획기적인 시대, 신기원) 을 그음.

☞ 에폭을 긋다 : 신기원을 열다(획기적인 사실로 말미암아 전개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다)

(4)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가 고전 속에 전통이 위치하고 있으며, 전통에서 새로운 창작의 방법론을 찾으려고 하는 미학관을 전파했다는 점임. 이러한 전통주의 미학관(=‘의 고적’ 미학관)의 토대에는 ‘민족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요체임.

(5) 이러한 김용준의 미학관은 잡지 『문장』을 주도했던 이태준과 현대시의 창작으로 실험적 실천을 담당했던 정지용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의 미술사학자 최순우, 유홍준 등으로 계승되어 21세기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

2. 근대시문학에서의 ‘향토적 정조’의 형성 과정과 한계

1) ‘향토성’이 주요한 소재나 주제로 부각할 수 있는 배경

(1) 일제가 근대를 추구했지만 아직 농경 사회의 토대를 크게 부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임.

(2) 총독부에 의해 진행된 근대화라는 것이 농촌공동체라는 미덕만을 훼손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틀을 바꾸지 못한 데 따른 조선 민중들의 반발 심리의 작용

(3) 따라서 당시 조선 민중들은 조선적인 것으로 ‘향토적 정서’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요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음.

2) 향토성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관념이 될 수 있는 근거

(1) 당시 대다수 민중들이 속해 있던 농경사회의 부산물

(2) 우리 민족의 토대를 이룬 전통을 형성하게 된 토속성을 밑바탕에 감추고 있음.

(3) 우리 민족의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마음’이 담김.

3) 주요한은 ‘샘물이 혼자서’, ‘비소리’, ‘고향 생각’ 등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적인 정조의 원류를 형성함.

4) 김억은 제2시집 『봄의 노래』에서 민요 시인으로서의 향토성의 세계를 창조함.

5) 소월의 시가 식민지 시기 가장 인기를 누리고 국민시인으로까지 추앙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요적 서정시’의 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임. 소월 시에서의 원형적인 사랑의 정감과 전원 심상 그리고 민중적인 정감의 가락은 향토적인 소재나 민담적인 배경 등과 어울림으로써 더욱 민족적 민중적인 호소력을 유발함.

6) 정지용의 ‘향수’(1923), ‘고향’(1932)도 향토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임. 정지용은 1930년대 중반에 가면 감각적 언어를 구사하여 모더니스트란 이름을 얻고 현대시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음.

7) 백석의 시집 『사슴』에 나오는 ‘여우난곬족’, ‘가즈랑집’과 다른 곳이 출전인 ‘고향’에는 다른 어떤 시인의 작품보다 ‘향토성’이 강하게 배어져 나옴. 그 향토성은 평북 사투리와 토속적인 소재를 통해서 우러나오며 유년기 화자의 순진무구한 정서를 통해 좀 더 정화되어 나타남 즉 향토성의 기본 특성인 ‘순수성’과 ‘고향 의식’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임. 백석의 시에는 “공통체적 삶이 만들어 내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세계가 살아 있음.

8) ‘향토성’을 예술적 시문학으로 승화시킨 또 다른 근대시의 흐름은 김영랑과 박용철의 시문학파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청록파가 있음. 김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에는 한국적 운율과 전통적인 정감 그리고 향토적 서정미가 잘 나타나 있음. 청록파 조지훈의 ‘고풍의상’, ‘봉황수’ 등에는 의고적 시작 태도와 전통 정서가 잘 드러남. ‘고풍의상’의 경우 문체마저도 문장파가 높이 평가한 ‘한중록’에 나오는 내간 수필체를 활용하고 있음.

9) ‘향토성’은 토속성과 전통성을 부각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순된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과 미래의 대안 마련을 위한 열정의 삭힘(숙성)을 강조함. 즉, 척박한 현실에서 기댈 곳으로서의 따뜻한 공간으로서의 의미와 차가운 ‘소극적 저항 의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 ‘향토적 정조’를 추구하는 시문학의 특징임.

내간체(內簡體) : 조선 시대에, 부녀자들이 쓰던 산문 문체. 일상어를 바탕으로 말하듯이 써 내려간 것으로, ≪한중록≫, ≪계축일기≫, ≪산성일기≫, ≪의유당일기≫, ≪조침문 ≫, ≪화성일기≫, ≪인현왕후전≫ 따위가 이에 속한다.

3. 1930년대 미술화단의 흐름과 김용준의 미학론

1) 김용준의 미의식은 초기에는 아나키즘적 전위예술론을 폈으나 점차 표현주의 예술을 대안으로 삼는 태도를 보임.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순수 심미주의 관점에서 향토적 서정을 강조하는 향토예술론을 전개함. 1930년대 후기로 가면서는 조선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 향토색의 특질을 고담한 맛, 한아한 맛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사학자 정인보가 주장한 ‘민족 얼’의 특질에 가까운 상고주의의 ‘관념적 정신주의’로 이끌어 감. 특히 『문장』의 편집인이었던 김용준은 이태준과 함께 “새로운 양식을 찾으려면 당연히 전통에 의거해야 한다”는 전통부흥론을 전개함.

2) 김용준은 동양예술론을 제창한 심영섭과 이태준을 지지하면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 조선의 예술론을 제창함. 그것은 동양정신주의와 향토예술론이었음.

3) 1931년은 김용준이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미술평론가로서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해임.

4) 1933년 8월 15일 김기림, 정지용, 이효석, 이태준, 이무영,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종명이 참가한 ‘구인회’가 창립됨. 얼마 뒤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이 탈퇴하고 대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회원으로 참가함. 그 뒤 유치진, 조용만이 나가고 김유정, 김환태가 새로 들어옴. 1930년대 전반기 미술사에서 구인회는 상당한 의미를 남겼음.

5) 이러한 구인회 멤버 중 모더니스트였던 이태준과 정지용이 몇 년 뒤에 『문장』을 통해 전통주의 미학을 추구한 것은 예술가로서는 대변신이었음.

6) 1934년에 이태준은 『조선중앙일보』를 통해 ‘조선주의론’을 주창함. 그는 타나베 이타로 같은 화가가 조선 기생을 조선 담 앞에 세우고 그렸다고 그것이 조선 미술이냐, 조선인의 작품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역설함. 그는 조선의 어떤 물체를 그리기 전에 조선 사람다운 작품을 창조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함.

7) 김용준은 특히 조선 정서, 조선 향토색의 본질에 대해 ‘고담(古淡, 예스럽고 맑은 느낌이 있음)한 맛’과 ‘한아(閑雅, 한가롭고 아담함)한 맛’을 제시함. 그는 신비적이라 할 만큼 청아한 맛, 소규모의 깨끗한 맛이 진짜 조선의 마음이라고 주장함.

8) 1937년 이태준은 『조선일보』에 쓴 미술평론에서 조선화 부흥운동을 소리 높여 외치며 서양 미술을 하는 이들이 동양화로 전향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함.

(1) 동서양은 뚜렷한 경계가 있어서 동양인이 서양 흉내 내기를 해봐야 성과를 얻기 어려 .

(2) 동양인 나름의 미점이 있으니 동양화는 동양화에 맞는 성질이 있을 것임.

(3) 생활과 작품은 한 덩어리인데 조선 생활을 하는 자가 서양화를 한다면 그것은 자기 분 열임.

(4) 김홍도나 장승업을 이어 나갈 사람은 조선인이라는 것이 사리와 기(氣)에 순(順)하는 것이고, 문학에 비해 조선 예술은 대단히 풍부한 유산을 갖고 있음.

(5) 서양 미술은 색채 본위이고 입체적이며 인공적인 데 비해 동양 미술은 비입체적임.

9) 이태준의 이러한 생각은 김용준 등과 함께 『문장』을 창간하면서 조선주의와 전통주의론으로 발전함.

10) 김용준은 ‘매너리즘과 회화’라는 비평을 통해 서양 미술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하면서 동양의 전통주의로 회귀하는 논조를 취함. 옛 것을 존경하고 탐색하되 새 것을 열망하는 야심을 갖고 어떻게 하여야 대상의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느냐 하는 회화의 근본 정신을 지킬 때 매너리즘에 떨어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통론으로 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함.

11) 김용준은 『문장』 창간호에 발표한 “이조시대의 인물화―주로 신윤복김홍도를 논함”에서 응물상형(應物象形, 사물에 따라서 형상을 그려내는 일. 즉 화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모습에 근거하여 대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함)하여 상(想)을 넓히고 진(眞)에 핍하여 개성(個性)의 힘으로 뚫어나가 참된 기운이 생동하는 혜원과 단원의 풍속화를 발견하고는 그 시대의 가장 ‘향토적인 문화적 공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예찬함. 즉 김용준은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참된 향토미의 전형을 찾음.

12) 1940년에 들어서서는 김용준과 이태준이 동시에 ‘전통부흥론’을 역설함. 김용준은 우리 미술유산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함.

13) 이태준은 노인들이나 즐기던 골동품들을 청년들이 사 모으기 시작했다고 호의적인 평가를 내림. 그는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라는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주검이나 무덤의 대명사일 것이라며, 청년 지식인들이 도자기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라고 말함. 즉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에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고 주문함.

4.『문장』에 나타난 정지용과 김용준의 간텍스트성

텍스트 상호 간의 관련성

1) 편집 4인방과 장정이 주는 상징―‘개성 존중’

1)『문장』은 각 분야를 나누어 몇 사람이 편집을 주도해 나간 것으로 보임.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와 고전 발굴 소개는 이병기, 그리고 장정과 표지화는 (길진섭과 더불어) 김용준으로 영역이 구분됨.

2)『문장』은 당시 192030년대 문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을 벗어나서 ‘전통지향적인 민족주의’의 양상을 지님. 『문장』의 이러한 특성은 장정에서 드러나는데 그 하나는 제호의 글씨체, 즉 추사 김정희의 필적에서 골라낸 제자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화가와 동양화가를 겸한 김용준과 길진섭이 그린 표지화임.

3) 문장파는 왜 상고주의 즉 고전에 탐닉했을까?

상실해 가는 전통예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 상실해 가는 우리들의 예술유산을 동양예술의 서양화적 계승으로써 계승하자는 것(전위예술가 조우식이 『문장』에 쓴 「고전과 가치」에서)

-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 그것이 주는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임. 거기에 정말 고완(古翫,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날의 기구나 예술 품. 골동)의 생활화가 있음.(이태준의 「고완품과 생활」

4) 김용준은 수필과 미술평론도 썼는데 수필에 주로 담겨진 내용은 동양회화 사상으로 문인화 정신인 ‘시화일치(詩畵一致) 사상’임. 김용준은 산수(山水), 화훼(花卉), 소과(蔬果), 기명(器皿) 등을 소재로 하여 문인화 양식의 전통적인 민족 문화유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장정을 꾸며 ‘전통주의적 민족주의’를 표현함.

2) 정지용의 은일적 삶과 ‘유유자적’의 시세계

1) 정지용은 「시의 옹호」에서 전통계승론의 비평적 태도를 취함.

2) 그는 ‘우수한 전통’이야말로 비약의 발 디딘 곳이라고 역설하고 경서와 성전류를 심독하여 시의 원천에 침윤해야 한다고 함.

3) 특히 남종화풍의 문인화에서 시의 방향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김용준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임.

4) 정지용은 1936년부터 1942년 무렵까지 그 이전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카톨릭시즘의 서구적 시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달관(達觀, 사소한 사물이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을 벗어난 활달한 식견이나 인생관에 이름. 또는 그 식견이나 인생관)과 유유자적(悠悠自適, 속세를 떠나 아무 속박 없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삶)의 시 세계를 개척함. 정지용의 이러한 시의 이름은 산수시(최동호) 혹은 자연시(오세영과 최승호)로 명명됨.

5) 정경교융(情景交融)은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경물 묘사가 시인 내부의 서정과 만나 융화하여 의와 사 양면에서 객체와 주체의 일체화를 이루어내는 고도의 미적인 경지를 말하는데 이는 정지용이 추구한 미적 경지였음.

6) 정신주의를 내세운 정지용은 자신의 시관으로 성정(性情, 성질과 심정. 또는 타고난 본성)의 시학을 주장함.

7) 정지용은 수덕(水德)의 특성 중 청정한 것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임. 그는 “성정이 물을 닮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음. 따라서 정지용의 성정의 시관은 노장사상(=上善若水의 철학)과 유가사상이 접목된 소박한 동양적인 세계관임.

8) 그의 후기 시를 대표하는 「삽사리」와 「장수산」은 동양적인 고요와 고독의 세계를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모색하는 ‘정신주의’가 드러나는 것이 특징임. 또한 현대인들이 잘 쓰지 않는 조선조의 한글 내간체의 어법을 사용하여 고전적 어법의 따뜻한 미감을 현대적 정서로 변용시키고 있음.

3) 김용준의 응물상형(應物象形)의 화도론(畵道論)

1) 당시 일제의 관변 미술가들은 조선 미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로서만 위치시켰고, 최고의 전성기는 당나라의 문물을 수용했던 통일신라시대로 생각했는데 1930년대 말 당시 이러한 관변 미술가들의 관점을 ‘조선 미술의 타율성론’이라고 함. 일본 관변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타다시는 고려 이후 조선의 전통을 부정하여 ‘조선 미술 퇴폐론’의 결론을 도출함.

2) 이에 반해 김용준과 이태준의 상고주의는 조선시대의 남종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문인화와 김정희,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등의 조선 시대의 산수화와 풍속화풍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임.

3) 당시 시대 정세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파고가 한반도로 밀려와 초등학교에서 한글 사용 금지, 창씨개명 강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와 잡지 폐간 등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한국의 운명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기였음.

4) 이때 『문장』 편집진들이 우리말을 민족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재로 인식했다는 점과 조선 시대의 문화를 고전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자세로 보여져 큰 문화사적 의미를 지님.

5) 김용준은 자신의 화론(畵論)의 기초를 중국 남제(南齊)의 화가 사혁의 육법(六法) 중 응물상형(應物象形)으로 잡음. 응물상형이란 화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모습에 근거하여 대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함.

6) 사혁의 육법(六法)

(1) 전이모사(轉移模寫) : 옛날의 유명한 그림을 모사하는 것

(2) 경영위치(經營位置) : 구도를 잡는 일

(3) 수류부채(隨類賦彩) : 사물에 따라서 색을 칠하는 것

(4) 응물상형(應物象形) : 사물에 따라서 형상을 그려내는 일

(5) 골법용필(骨法用筆) :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선을 고르는 것

(6) 기운생동(氣韻生動) : 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 가장 정신적인 내용과 관련되면서 육법의 구심점이 됨. 명나라 문인이자 화가인 동기창은 기운(문장이 나 서화에서 풍기는 기품이 있는 멋)은 배울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에 나면서 저 절로 아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하늘이 부여하는 것으로 봄.

7) 김용준은 그림에서 정신적인 기품, 즉 화격(畵格)을 중시함. 그리고 화격을 통해 화도(畵道)에 이르러야 한다는 작가적 태도를 강조함. 하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응물상형을 통해 상상력을 넓히되 진(眞)에 핍하여 개성의 힘으로 뚫어 나가는 곳에서 참된 기운이 생동할 수 있다고 역설함. 당시에는 응물상형이 없이 기운생동만을 강조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조선시대 회화에서 창조적 정신과 개성의 중대성이 몰각하게 되었고 회화가 쇠퇴하게 되었다고 비판함. 그것의 대안으로서 직접 대상을 사생하는 응물상형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문함.

8) 김용준은 사생을 통한 전통 고전의 전형으로 정선, 신윤복, 김홍도의 찾아냄. 겸제 정선은 산수사생에, 혜원 신윤복과 단원 김홍도는 인물사생에 힘써서 그들을 높이 평가함.

9) 또한 그는 그림이란 것이 ‘응물상형’에서만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봄. 그는 서법, 화법이 아니라 화도(畵道)요 서도(書道)인 것이라고 강조함.

10) 김용준의 화론의 기본 중 기본은 시화일체(詩畵一體)의 상승(上乘, 두 가지 이상의 요소가 서로 효과를 더하는 일)을 예찬하는 것이었음. 동서고금을 통하여 회화의 최고 정신을 담은 것은 남화이고 남화의 비조(鼻祖, 시조(始祖))는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서화가인 왕유(王維)이니만큼 그의 시화일체의 정신은 뚜렷이 살아갈 것이라고 예찬함.

11) 표지화와 권두화를 통해 김용준과 길준섭이 실험한 것

(1)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서(書)를 부활시킴.

(2) 낙관(落款, 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일. 또는 그 도장이나 그 도장이 찍힌 것)을 도장으로 찍는 전통 문인화의 형식을 현대 장정 표지화에 응용하는 방식을 취함.

(3) 표지화와 컷 등에서 동양적, 조선적 소재를 취해 먹과 선의 특징을 살린 기법을 많이 활용함. 대표적인 경우가 표지화에서 그린 매화 그림임. 그가 선비의 강건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면서 기품을 표상하는 매화를 폐간 전호 표지화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문 장』 편집 동인들이 폐간 이후에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임.

(4) 표지화에서 난초, 매화 등의 사군자, 남종산수, 괴석, 문방사우, 민예품, 고분 벽화, 일상 풍경 등을 두루 소재로 취급함.(의고적 전통주의+현대적인 실험적 변용)

(5)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진기한 옛 그릇과 화초·과일·채소류를 소재로 그린 그림)>의 기법을 되살려 고전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실험을 시도함. 이러한 현대적 변용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 속에 한문 글자가 아닌 한글이 들어가 있다는 점과 구비문학적 변용으로 오래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임. 이러한 시도는 그림에 서(書) 가 들어가는 남종화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한문의 ‘반민중성’을 극복하고 은유적 저항의 자세도 취하는 모양새를 갖춘 것으로 판단됨.

5. 맺음말

1) 정지용과 김용준은 애초에는 서구적인 방법론에 의존하여 소위 모더니스트로서의 풍모를 과시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음.

2) 그러나 정지용과 김용준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광포한 식민지적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고전의 전통에서 우리적인 것을 찾아 그것을 현대적인 미감으로 삭혀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려고 하는 상고주의에 젖어 있었다는 점임.

3) 또한 시서화의 일체를 강조하는 왕유적인 남종화의 문인화풍을 즐기면서 깊은 내면의 정서에 침잠하는 ‘정신주의’에 골몰했던 점도 일치됨.

4) 정지용의 시와 시론 그리고 김용준의 그림과 화론 사이에 공유하는 ‘간텍스트성’

(1) 회화적 기법을 통해 관념성과 정신주의를 표출하는 특징을 보임.

(2) 주관성에 입각한 표현론적 관점의 입장

(3) 남종문인화의 시서화 사상이나 탈속적 정신을 계승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점

(4)‘고요’와 절제미에 근거한 ‘여백의 미학’, 물아일체의 ‘정경교융’의 동양적 시학 등을 예찬함으로써 광포한 식민지 현실에서 한발 빼고 소극적인 저항의 포즈를 취하려 고 한 점

『문장』의 지향점(「『문장』과 정지용」에서 발췌)

1) 김윤식 : 상고주의로 파악하고 선비다운 맛과 고전에의 후퇴라고 정리함.

2) 김용직 : 전통 지향 또는 전통주의로 봄.

3) 황종연 : 『문장』의 전통주의는 한국학의 성장을 통해 강화된 전통의식과 서양추수주의근대주의에 대한 회의의 결합 형태라고 정신사적 측면에서 해석함.

4) 최승호 : 선비 문화에의 지향과 문인화 정신의 추구로 해석함.

5) 광포한 군국주의와 포악한 민족 정신의 말살 정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색에 맞선‘전통주의적 정신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

6) 그리고 그것을 과거로의 회귀나 퇴영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하여 실학파의 ‘법고창신’과 ‘탁고개제’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함. 즉 자신들의 전통 지향이 도피적인 안주와 문화적 퇴행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한 전통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 이념 운동임을 강조함.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

탁고개제(託古改制) : 옛 것(古)에 의탁(托)하여 제도(制)를 고친다(改)는 뜻

7)『문장』의 전통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 작업’임. 순수문예지에 ‘한중록’, ‘도강록’, ‘호질’, ‘인형왕후전’, ‘고시조선’, ‘토별가’, ‘요로원야화기’ 등 상당히 많은 양의 고전문학작품을 실은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로 그것은 『문장』 편집진이 얼마나 고전문화 유산 발굴과 민족적인 특성 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줌. 또 『문장』은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문학(민속학 포함)과 국어학, 고미술 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대대적으로 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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