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신용목의 「만약의 생」평설 / 송종원 본문

시 비평

신용목의 「만약의 생」평설 / 송종원

오선민 2012. 8. 16. 17:32

 

신용목의 「만약의 생」평설 / 송종원

 

 

 

 

 

 

 

 

               만약의 생

 

 

 

 

                                                         신용목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문학사상》2012년 6월호

 

 

 

 

---------------------------------------------------------------------------------------------------

 

 

 

 

             구슬픈 육체

 

 

 

 

 

 

  이 글의 제목은 김수영의 시에서 빌려 왔다. 김수영의 시답게 「구슬픈 육체」에도 이상한 말들이 참 많다. 이상하지만 아프고, 아프면서도 매혹적이며, 그래서 점점 이상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마음의 틈에 스미도록 하는 말들. 그런데 저 이상한 말들이 여는 것은 독자의 마음만이 아니다. 때론 한 시인이 그가 열어놓은 공간 속에 들어가 다시 새로운 감각과 사유가 움터날 간격을 벌여놓기도 한다. 물론 그 일은 의식적인 작업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한 시인과 또 다른 한 시인의 몸이 우연히 서로를 건드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김수영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중 다음과 같은 묘한 다짐을 한다.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선언이다. 한 아름다움이 끝이 났다는 선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깨달음을 내재하고 조화로우며, 영원하면서 귀결이 있는 그런 아름다움과 이별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김수영은 자주 한국어에 간섭하는 오래된 아름다움의 정형을 파탄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현재적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시를 통해 그런 판단을 선언했다면, 신용목은 자신의 시로 선언 이후의 삶을 밝힌다. 선언의 언어 안에 잠들어 있던 빛을 길어 올려 말이 삶이 되는 모습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자, 긴장하시라. 환한 빛의 고통이 쏟아져 내릴 순간이다.

 

 

시는 느닷없이 묵시록적인 분위기로 시작한다. 창밖으로 검은 재, 날린다. 불타오르던 한 시절이 지났다. 하나의 국면이 끝났는데 경적은 그제야 울리는 상황. 무언가 큰 위험 하나가 지나갔다는 신호였을까. 아닌 것 같다. 이 시에 그려진 위험 상태는 귀결이 있는 상황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옥이란 말이 낯설게 새겨져 있어 하는 말이 아니다. 저 경적 소리, 자꾸만 허망하게 들리는 그 소리 때문이다. 때를 맞춘 신호들로부터 우리의 삶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우리는 이미 오래전 때를 맞춰 일어나며 조화롭고 귀결이 있는 사건들로부터 추방되었다. 우리의 경험과 희망 사이의 거리가 이를 증명한다. 일어나길 기대하는 사건은 잠잠하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래서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삶. 경험이나 인식을 자기의 의식으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이란 말뜻의 통각(統覺)이 불가능해진 삶. 경적 소리를 토해내는 이 시의 여백은 저 삶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여백 위로 솟아오른 글자들을 통해 기억을 다시 쓰는 일종의 행동으로 나아간다. 경험과 희망이 어긋난 이 시간대를 사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저 어긋난 시간을 돌려놓을 것인가. 신용목의 시어가 비추는 삶의 태도는 특이하다. 그는 돌려놓을 제자리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는 듯, 어긋난 시간을 총력을 다해 어그러뜨리는 데만 열중한다. 어떻게?

첫째,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준비도 없이, 그것을 과감하게 소모하는 방식으로 살기. 이 선택은 어딘가 아프다. 여기에는 어떤 원한의 심리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독점했기 때문에 미래를 보장받는 사람들에 대한 원한 말이다. 그들이 순탄한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의 무구함을 희망할 때, 시인은 그들의 희망에 절망한다. 어두운 현실에는 눈을 두지 못한 채,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타인의 몸짓을 물음의 형식으로 타박하는 이에게 시인은 단정한 미래의 형식이란 자신에게 없다고 답한다. 시인의 답변과 몸짓은 단정하게 수납된 미래를 희망하는 대신에 현재의 절망을 미래 속에 좀더 분명히 기입하기를 꿈꾸는 행위에 가깝다. 어쩌면 그는 미래를 지운 자기 파괴적인 행위만이 현재의 독점과 축적을 통해 미래를 보장받은 자들의 꿈을 가장 순결한 방식으로 더럽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밤과 같은 절망 속에서 그렇게 발가벗고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둘째, 막막하게 그리움의 학대를 견디기. 그것을 통해 역사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신용목의 육체 또한 불면의 밤을 보낸다.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의 자장(磁場)은 역사 속에서 아직 역사화 되지 않은,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현실’을 불러와 현재적 육체를 그렇게 시달리게 한다. 달리 말해 그리움은 변화의 필요를 느끼는 육체의 반응에 가깝다. 시인은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 시인 또한 그것을 알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우리를 이끌고 우리를 바꾸며 때론 우리를 학대한다는 진실까지도 그는 이미 알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능청을 떨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는 저렇게 능청스러운 말을 했을까.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는 말이 품은 정직성을 경직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유연함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또한 저 가벼운 유연함이 우리의 삶을 쓰라린 기억과도 단절시킴은 물론이거니와 거친 희망조차 품지 못하는 가짜 천국의 상태로 놓아두는 지를 조롱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신용목은 중단할 수 없는 그리움에 몸을 내맡기며 그리움의 자장에 놓인 고통에 찬 육체의 지순함을 믿는 자다.

 

 

 

 

————

 

송종원 /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웹진문지》 주간문학리뷰 2012.08.1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