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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최금진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평설 / 차성연

오선민 2012. 9. 7. 10:16

최금진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평설 / 차성연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금진

 

 

장미를 라면 속에 넣고 끓여 먹은 적이 있다네

한 바구니 붉은 꽃잎들이 숨이 죽고 팔팔 끓을 때

너에 대한 혐오, 너에 대한 집착, 사랑의 양가성

설사를 하고, 설사에 향기가 없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헤어지고 만 것을 알았다네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유월이었고

허기가 컵라면의 본질이란 사실을 후루룩 마시며

사랑이 정욕이었다는 기억마저 식었을 때

헐떡이는 개처럼,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돼지처럼

갑자기 사는 게 몽롱해졌다네

너무 많은 허무가 코끝으로 소용돌이치며 몰려들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너도 스무 살이었던 것

편의점 맞은편 담장 아래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네

다 가버렸네, 믿었던 것, 믿고 싶었던 것, 믿어야 할 것

아주 약간의 희망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온몸으로 장맛비를 붕대처럼 감고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장미는 지고 있었네 빗줄기 속에서

너를, 너였던 것을, 너 아닌 것을 후루룩 마시고 있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멈추었다 가고, 멈추었다 가고

누가 이 절망의 스승인지

사랑은 가고, 사랑이라 여겼던 무지와 치욕마저 가고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

 

 

—《현대시학》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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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내 안에 두는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니! 브레히트가 노래하고 한국의 386세대가 즐겨 전유하였으나, 이제 후일담도 애도도 지나간 시기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읊조리는 자는 누구인가. 최금진이라면 그럴 만하다. 여전히 있는 ‘가난’을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취급하던 시기에, 지워지지 않는 ‘가난’의 유전자를 기입한 채 우리 앞에 나타났던 최금진이라면, 이 시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하기에 그럴 만할 뿐 아니라 충분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라고 읊조린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장미를 라면 속에 넣고 끓여 먹은”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라면을 먹고, 설사하고 그녀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기억은 떠오르고 “편의점 맞은편 담장 아래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다 가버렸”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최금진의 신작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별시로 읽힌다. 연인을 떠나보내고 남은 잔여의 감정마저 떠나보내려는 자의 회한.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타인을 사랑하는데 너무 많은 리비도를 투여한 나머지 갑작스레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리비도를 다시 철회하는 과정이 애도이다. 지나치게 사랑했던 만큼 지나치게 되돌아오는 리비도를 감당하지 못하여 자학을 넘어 죽음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면 이를 우울증이라 부른다.

시의 맥락으로 보면 장미와 함께 “너에 대한 혐오, 너에 대한 집착, 사랑의 양가성”을 팔팔 끓여 먹고 설사까지 했으니 ‘장미-타자’와 타자에 대한 양가적 감정까지 배출된 셈이고 이렇게 애도는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다시 떠올리고 말았으니 애도가 실패했음이 판명되는 순간이다. 물론 장미 라면을 먹은 시기에서 편의점 라면을 먹은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애도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의 의식은 애도가 끝났다고 여겼으나 무의식은 끝나지 않은 애도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 그리하여 애도의 과정을 보여주는 시로 읽을 수 있는「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무의식의 대상 상실과 연관되면서 우울증에 대한 시가 된다. 우울증은 회수된 리비도가 자아를 공격하며 자기학대와 비하, 자살충동을 불러온다.

“사랑은 가고, 사랑이라 여겼던 무지와 치욕마저 가고/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를 보면 확실히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우울증에서 비롯된 자기비관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이 사랑한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근원적 결핍을 상실로 전이한다. 시적 자아가 느끼는 “너무 많은 허무”, “코끝으로 소용돌이치며 몰려 ”드는 원인 모를 상실감, 장미 라면을 먹어도 편의점 라면을 먹어도 ‘나’의 결핍은 메워질 수 없으니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라면의 본질은 ‘허기’에 있으니 아무리 라면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것.

최금진의 전작시들을 보면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가난한 유령들에 둘러싸인 시적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저수지에 빠져죽은 시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지지리도 가난한 친척들……역마살을 피의 유전자로 물려받은 시적 자아는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 이렇게 최금진 시세계의 한 축은 과거의 유령과 더불어 있었다. 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기 안에 ‘합체(incorporation)’하였기에 그의 전작시들은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는 이들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나’ 또한 ‘너’를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면서 실은 계속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히고 있다. 라면을 먹는 행위는 ‘너’를 잊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다. “너를, 너였던 것을, 너 아닌 것을 후루룩” 마심으로써 ‘너’는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시적 자아가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라며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너’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너’의 목소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들려온다. 마찬가지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은 보지 않으려 해도 곳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온몸으로 장맛비를 붕대처럼 감고/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장미는 내 안에 있는 ‘너’이자, 외부로 흘러나온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미 합체된 ‘너’이기에, 이제는 구분 불가능한 ‘나/ 너’이기에 장미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편의점 컵라면으로 간단히 해결하려는 청춘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열패감으로 자기비관을 넘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인생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우리 시대의 상실, 그 근원적 결핍을 노래한 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최금진 시의 우울증적 주체는 그 시세계의 일관된 목소리의 주인이자 불현 듯 출몰하는 무수한 유령들의 얼굴이다. 그의 시는 밑바닥 삶의 가난과 그로 인한 날것 그대로의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고, 기억의 연원이 되는 유령들의 장소, 그 설화적 세계를 그려내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그의 시세계는, 떠나보내지 못한 과거의 유령들을 내부에 합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 것처럼 들었던 우울증적 주체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시인의 내부에 오래 똬리를 틀고 있는 과거의 세계는 ‘너’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합체하는 타자성의 능력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슬픈 이유이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가진 윤리의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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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연 / 문학평론가. 2010년 〈세계일보〉신춘문예에 평론 「특수한 보편, 무수한 ‘이야기’들의 겹침—김연수론」당선. 현재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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