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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이명수의 「꽃멜」평설 / 강영은

오선민 2012. 9. 7. 10:19

이명수의 「꽃멜」평설 / 강영은

 

   꽃멜

 

                            이명수

 

 

해 질 녘 모슬포 부둣가 한 귀퉁이

아들이 갓 잡아온 멸치를

할머니가 손질해 말리고 있다

은빛 물결 잦아들면

멸치는 숨죽이며 몸을 뒤척이고,

노을빛에 할머니가 꽃처럼 곱다

5천 원 주고 꽃멜 한 봉지 얻어 배낭에 넣었다

몇 백 마리 멸치 온기가

한기 어린 내 등을 따뜻이 덥혀준다

 

갈매기들이 따라온다, 길고양이도 따라온다

‘한 마리 주면 안 잡아먹지’

절반을 주고 십리 길 절반은 왔다

그래, 내 손으로 잡은 것도 아닌데,

혼자 걷는 길에 동무 삼았으니

남는 장사다

 

은빛 멸치를 마당에 풀어놓았다

당선에서 멜밭을 보고

망선에서 후림을 늘여

서캐코는 서역콧으로

동캐코는 눈구문여로*

 

한 이틀 나도 봄볕에 몸을 말리며 함께 놀았다

몸이 고프다

물엿에 참기름 몇 방울, 고춧가루 조금 얹어

달달 볶았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절묘하다

 

뱃속이 조화를 부린다

바다가, 하늘이, 바람이, 불길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온다

꽃멜 하나에 이밥 두 술

공자님 말씀대로 한 끼니 공양한다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

 

꽃멜 먹고 꽃잠 잔다

이 정도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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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멸치 후리는 소리’ 중 한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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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화풍(地水火風)의 맛과 멋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했던가. 떠남과 머무름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풍경과 시간을 변주해 내는 이명수 시인은 늘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티베트와 몽고, 중국을 넘나들며 시집 『풍마 룽다』속에 풀어놓았던 시편들은 떠돎 속에서 터득된 삶의 성찰이 돋보이는데 최근에 발표한 제주 시편들도 그러한 시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감관과 도정에서 만난 대상에 대해 곡진한 사유를 보여준다. 「꽃멜」역시 그 중 한 편이다.

꽃멜은 꽃 멸치를 부르는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 북쪽 근해와 추자도 근처에서 잡히는 꽃 멸치를 말함인데 몸통 중앙의 백색 비늘 사이에 짙은 은색 비늘이 선명히 박혀 있을 뿐 아니라 멸치라고 부르기엔 좀 미안한 감이 들 정도로 그 크기가 송사리만하다. 보리가 익는 계절의 꽃멜은 특히 맛이 좋다. 산란기에 접어들어 기름기가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잡은 신선한 멜은 소금구이로, 국으로, 지짐으로, 젓갈로 다양하게 조리되어 입맛을 한창 돋우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해풍에 적당히 말린 꽃멜을 설탕을 넣은 간장에 조려 먹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수화풍이 관계하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바다가, 하늘이, 바람이, 불길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묘사한다. 불교에 의하면, 지수화풍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소 중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요소이다.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는 물성을 의미하지만 제주 사람만이 아는 맛을 찾아낸 시인의 미각을 따라가면 우주와의 융합 속에서 핍진한 생을 넘어서려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노인을 꽃처럼 보는 심미안과 길고양이와 갈매기에게 꽃멜을 보시하는 자비지심의 경지는 전도망상된 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자에게서 나오는 행위일 것이다. 인과 연이 멸하여 사라지는 유위법의 관점을 견지하는 시인의 삶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자가 술이편(述而篇)에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가운데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자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다. 옳지 못한 부귀나 명성 같은 것은 내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고 말했듯이 안주의 즐거움과 떠돎의 고통 사이를 헤매는 나그네의 길이 인생이라는 것을 성찰한 혜안이 있기에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에 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꽃멜 먹고 꽃잠” 자는 경지야말로 만물의 변화에 대응하는 내면이 평정심을 지닌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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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제주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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