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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내려오는 이야기

오선민 2013. 2. 26. 12:04

원주에서 내려오는 이야기

1.강감찬과 개구리

원주시 일산동 54-2번지에는 옛 감영때 건물인 선화당이 있는데 그 뒤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 없어졌지만 그 자취만은 남아있다.

지금부터 구백여년전부터 그때의 명장인 강감찬이 이곳에 들렸다 한다.

강장군이 왔다 해서 이 고을 수령은 극진한 대접으로 그를 환영했다. 때는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강장군을 조용한 가운데 편안히 주무시게 해야겠는데 객사바로 옆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해 잠을 이룰수가 없을 것 같았다.

수령은 하인을 시켜서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초를 세웠다. 연거푸 연못에 돌을 던지면 개구리들이 놀라 울음을 그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인은 열심히 초저녁부터 주워온 돌을 던졌다. 이에 놀란 개구리들은 처음 얼마동안은 잠잠했으나 나중에는 계속해서 악마구리 끓듯 울어대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수령의 명을 받은 하인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중에는 큰 장대를 가져와 두들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감찬은 방안에서 대발 밖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하인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안스러웠다. 그는 그 하인을 불러 지묵을 가져오라 했다. 그 하인은 개구리를 못 쫓아 장군을 잠못들게 한 것이 죄스러워 몸둘바를 몰랐다.

그는 지묵을 장군에게 갖다 바쳤다. 그랬더니 강감찬은 부적 한 장을 써주면서 그것을 연못에 던지라고 하인에게 명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렇게 법썩을 떨던 개구리들이 울음을 뚝그치는 것이었다. 강 감찬 은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편안히 잤다. 이튿날 아침 수령은 강장군 방에 문안을 드리러 와서 "대감 간밤은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워낙 연못 가까운데 있는 침실이라서 혹시 개구리 울음소리에 단잠을 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잘잤소. 한 밤중이 되니 그 후부터는 개구리가 울지 않더군요"

"실은 하인을 세워 개구리를 쫓았습니다" 수령은 자기 성심을 생색내려 했다.

그러나 강감찬이 부적을 던진 후부터 그 연못부터에서는 다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다.

2.비두리 마을의 이야기

문막읍에 비두리라는 마을이 있다. 속칭 비두네미라 부르는 이곳에는 예날부터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와 그것이 비석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오늘의 거돈사터에 세워진 승묘탑비를 세울 때의 이야기이다. 비과 좌대는 완성됐으나 비갓을 만들만한 석재가 마련되지 않아 거돈사 주지는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이 마을 근처에서 화강암이 나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석공을 데리고 가서 알맞은 바위를 떠 용이 구름에 쌓여 있는 양각 무늬까지 쪼았다. 그러나 막상 이 비갓을 옮기려 하니 어떻게나 무거운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건 무슨 곡절이 있는게 아닐까." 힘께나 쓴다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이 갓이 꼼짝도 하지 않자 모두 슬며시 꽁무니를 빼고 없어졌다. 절쪽에서는 심히 난처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스님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렸다. 그는 어느 농가에 들려, "이 댁에서 먹이는 소 좀 빌립시다." 하고 부탁해 왔다. "무엇을 하시렵니까?" 주인이 물었다. "비갓을 실어 옮겨야겠는데 댁의 황소면 거뜬히 할 수 있을것 같소." 주인은 선뜻 승낙해 주었으나 내심으로는 수십 면의 장정들이 모여 옮기려다가 옮기지 못한 것을 스님 혼자서 어찌 황소 한마리의 힘을 빌려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은 소에게 쇠족을 잔뜩 먹여 외양간에서 끌어내 앞마당에 매어놓았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소를 끌로 갈 듯한 스님이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를 않았다. " 실없는 중이로군. 익한 밥 벅고 선소리치는 사람이로군." 주인은 일부러 쇠족까지 잔뜩 먹여 놓은 일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때 스님이 나타났다. "주인어른 고맙소이다. 긴히 부리고 소는 잘 모셔왔습니다." 주인은 놀랐다. 종일 마당에 매어 있었는데 언제 소를 끌로 갔다 돌아왔다는 말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 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주인의 생각을 눈치챈 스님은 "네, 몸뚱아리는 그래로 두고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일을 마치고 무사히 왔소. 소가 몹시 힘겨운지 땀을 흠뻑 흘리고 있소."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라 주인은 비갓을 옮겨갔다는 비두네마을로 가보았다. 이미 비갓은 분명히 옮겨졌고 그것을 끌고 간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비두네미로 불러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행구역명으로 "비두리"로 고쳐졌다 한다.

3.국형사의 이야기

이조의 두 번째 왕인 정종에게 줄 때 딸 희희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병으로 항시 병석에 누워 있었다. 세상에서 용하다는 명의는 다 불러다가 고쳐 보려 했으나 도무지 약효가 없어 오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한사람의 전의가 명산 대찰이나 산자수명 한곳을 찾아가 요양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진언했다. 왕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라 쾌히 허락했다.

"그럼 그럴만한 곳이 어디 있는가?"

"네 동악 중턱에 있는 고문암은 신라 경순왕때 무착대사가 창건한 암자로서 항상 명잔의 정기가 넘쳐 흐른다 하옵니다. 이곳에 가서 기도를 드리면 공주님의 병은 나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고문암으로 온 희희공주는 수양을 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먼저 백일 기도를 시작했다. 매일 같이 드리는 그녀의 간곡한 기도소리에 감응이 되었던지 어느날 공주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이곳 동악의 신령이오 공주의 지극한 정성을 받아들여 병을 낫게 해 줄터이니 과히 걱정마오" 하고 사라졌다.

산신령의 말처럼 백일기도를 마치자 공주는 다 나아 궁궐로 돌아갔다. 이때 아바마마인 정종의 기쁨은 어디로 비할바 없었다.

"그래 어떤 암자인데 그렇게 영험한 이적이 있단 말인가? 내 그 암자를 위해 덕을 베풀리라" 정종왕은 이렇게 약속하고 절을 중건하도록 해 줬다.이리하여 그 자리에서 다시 큰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 절 이 오늘날의 국형사이다.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6Km 지점, 치악산중턱에 있다. 본시 이절은 무착대사가 창건했는데 당시에는 고문암이라 불렀다

4.용마암에 얽힌 이야기

치악산 상원사에서 동남간으로 제천땅 백련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주지스님은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스님이면서도 아내를 두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스님은 치악산 남대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의 주지도 겸했다. 이 스님은 백련사와 상원사를 왕래하며 두절의 주지 스님으로 있었는데 불제자로써 마땅히 불도에만 정신을 쏟아야 할 터인데도 여자를 너무 좋아하여 백련사에는 본처를 두고 상원사에도 소실을 얻어 재미를 보고 있었다. 주지 스님이 상원사에 가는 날이 잦아지자 백련사에 있는 본처는 몰래 남편의 뒷조사를 해봤다.

그랬더니 상원사에 젊은 소실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스님과 몰래 살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나 본부인은 참고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이 스님은 백련사에서 상원사를 용마(龍馬)로 왕래했다. 용마는 번개처럼 잘 달리는 말이었다. 슬며시 화가 난 본처는 내놓고 싸울수 도 없어 속으로만 앓고 있다가 스님이 타고 다니는 용마를 굶겨 죽이기로 했다.

"저 놈의 말만 없으면 스님은 첩이 있는 상원사를 자주 가지 못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되도록 말에게 풀을 적게 먹이기로 했다. 한번 뛰었다 하면 천리도 마다 않는 용마였지만 본처의 계획적인 음모로 어느 날 스님을 태우고 상원사로 달리는데 도무지 기운이 나자 않았다. 속 모르는 스님은 용마에게 채찍만 호되게 내리쳤고 주인의 채찍을 맞은 용마는 용을 써 겨우 상원사까지 이르러 그만 마지막 바위에 턱을 대고 털썩 거꾸러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등에 올라탔던 스님은 말잔등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바위에 손을 짚었고 말은 앞발을 디딘 채 그 바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벼랑으로 떨어졌다. 그 후 가까스로 올라온 스님은 이것이 큰부인의 소행이었음을 알고 소실과 상원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때 스님의 손자국과 용마의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고 말이 떨어지며 흘렸다는 핏자국이 또한 남아있어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마바위"라고 부른다.

치악산 남대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는 우리 남한에서는 제일 놓은 곳에 자리잡은 절인데, 이 절 바로 앞에는 40m나 되는 벼랑이 있다. 그 벼랑 위 바위 끝에는 말발자국 형태와 사람의 손가락 자국같이 파인 곳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그 밑으로는 갈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말발자국과 손자리, 그리고 갈색의 흔적에 관한 전설이 위에 소개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용마전설은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장수전설과 관련된 것이 흔하다. 그러나 원주의 용마전설은 승려의 비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것이 특징이다. 또 말발자국 뿐만 아니라 손자국과 핏물 흔적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복합적 전설의 성격을 보인다. 그러나 말발자국이 현재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지역의 용마전설과 공통점을 보인다. 용마와 관련된 암석 전설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그 종류도 여러가지인데, 원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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