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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인연서설 - 문병란

오선민 2013. 3. 30. 08:09

인연서설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 문병란 시인 대표시선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178쪽

 

 

*인연이란 사람과 사람의 운명적 연결 고리이자 우주적 신비와 섭리 그 자체이다. 우연이면서 필연이요, 전생의 업보 그 자체이다. 1999년에 간행한 시집의 표제시로서 많은 애독자를 가지고 있는 대표 시이다. '거리의 교사' 란 닉네임으로 강연 다니고 학원에서 밥을 빌며 들락달락 어지럽게 살아온 이력서 위에 어느덧 정년의 나이가 다가올 무렵 교단을 떠나는 시기에 <인연서설>이었다. '서설' 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여 어울리지 않는 듯했으나 <땅의 연가>를 애송하던 스님이 이 시로 바꾸었다 하였다. 본래 '인연' 이란 말이 불교적 말이지만 이 시에선 반드시 그런 종교적 이유로 쓴 말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괴로움과 기쁨을 나누는 사랑의 내력으로 쓴 말로서 슬픈 시이나 그런 흔한 감상은 아니다.

 

-제1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집 발췌

출처 : 한국시낭송예술인협회(구. 전국시낭송가협회)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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