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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흐드러지다 2/ 박이화

오선민 2013. 5. 30. 18:21

 

 

 

흐드러지다 2/ 박이화

 

 

간밤

그 거친 비바람에도

꽃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리어 화사하다

 

아직 때가 안 되어서란다

 

수분(受粉)이 안 된 꽃은

젖 먹은 힘을 다해

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악착같이 가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단다

 

그러나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단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때가 되어 떠나는 일 그러하듯

때가 되어 꽃피는 힘 그 또한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도 분명 그러했을 터

 

-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 시작,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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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종기 시인의 ‘꽃의 이유’란 시가 있다.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물어보면 어쩔까.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아, 그렇구나. ‘간밤 그 거친 비바람에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죽을힘을 다해’ ‘가지를 붙들고’ 놓지 않는 이유가 사랑인 것을. 제 존재의 이유인 수분을 다 하지 못한 때문이란 것을. 그리고 그 생식행위는 분별력이나 지혜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하물며 꽃들이 그저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피어나는 것은 분명코 아니다.

 

 생식능력은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중요한 특성이다. 새로운 생명체를 생성해내는 재생산행위는 그들의 의무이자 권리다. 식물에게는 이러한 꽃들이 생식을 담당하기 때문에 좀 더 아름다워지고 향기롭고자 한다. 꽃이 꿀을 제공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꽃이 피는 이유처럼 꽃이 지는 일 또한 사랑의 본질이며 이치다.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다’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총력을 기울여 꽃을 떨어뜨린다. 개화가 필사적이듯 낙화도 필사적이다. 꽃잎이 시나브로 가지를 떠남으로써 개화의 대미는 장식된다.

 

 최영미 시인은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라고 사랑의 잔영에 대한 아픔을 노래했다. 하지만 박이화 시인은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이 사랑의 절정기였음을 고백하면서도, 꽃이 진다는 사건을 통증이나 환멸이 아닌 우주의 힘과 섭리로 고이 받아들인다. ‘때가 되어 꽃피는’ 일이 그렇듯 ‘때가 되어 떠나는 일’ 또한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가뭇없는 뒷모습에 가만 손이나 흔들 밖에는.

 

 

권순진

 

고궁-조용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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