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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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 5·18민중항쟁 27주년기념 백일장 시 부문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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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저씨가 단숨에 내뱉은 그때 ‘그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은 이 시가 18세 소녀의 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라는 찬사를 받았다. 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가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공동체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자는 취지로 2007년 개최한 백일장에서 대상을 차지한 당시 경기여고 3학년 학생의 작품을 보고 심사를 맡은 정희성 시인은 경악했다고 한다. 30년 전 ‘그날’의 일을 요즘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싶었는데, 항쟁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을 어린 학생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그날'의 현장을 이토록 놀라운 솜씨로 몸 떨리게 재현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날’은 한 아저씨의 자전거에 올라탄 학생이 진압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학생을 진압군에게 내주고, 평생을 후회와 슬픔으로 살아야 했던 '나'에 대한 고해성사인 것이다. 산문형식의 이 시에는 5·18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하였다. 학살당한 어린 시민군의 슬픈 얼굴,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시민의 비애,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진압군의 총구, 제 나라 국민에게 등을 돌린 비겁한 언론사들, 여기에 살아남은 자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까지. 5월의 아픔과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5.18도 4.19나 6.25와 마찬가지로 역사 속으로 깊숙이 숨어 교과서 안에서 밑줄 그어준 대로 관념으로만 이해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는 ‘그날’ 그 사람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5.18이었다. 며칠 전 한 종편채널에서는 탈북군인이란 자와 한 대학교수가 출연해 북한군 투입설을 사실인양 양양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들은 5.18을 6백 명 규모의 북한군 대대 병력이 침투해 벌인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에 대한 무력진압과 학살은 정당하고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대우나 추모도 가당찮다는 논리다. 이를 은근히 부추기고 근거 없는 루머를 확산시키는 야비한 언론의 태도는 또 무언가.
일부 극단적 우익세력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도 종북 세력의 음모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낯 뜨겁고 한심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입으로 아베 정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망언망동을 비난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닌 북한군의 책동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입이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위안부의 정당성을 말하는 저들의 입과 다를 게 무언가. 이는 역사왜곡을 넘은 반문명적 역사인식인 동시에 30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처에 또 다시 식초를 들이붓는 격이다. 그들의 눈과 가슴에는 '그 날' 희생된 이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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