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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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부부)/ 정덕희
어제 멀리 떠난 당신
오늘 내 몸속 혈관 곳곳에
번져 있습니다.
하나일 수 없음에도
내 안의 당신이 되어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려 강요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나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영원한 타인처럼
멀어지다가
다시금 내 속으로 파고드는
당신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나인가 봅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호흡소리마저 잠재울 고요속에서
천둥번개 치는 예측키 어려운
추리극 속의 주인공인양
당신과 난 타인일 수 없는
또 다른 타인입니다.
멀어져 버린 시간에도
호흡, 느낌, 감각으로
만질 수 있는 당신은
진정 타인일 수 없는
나의 한 부분입니다
- 에세이집『나는 나에게 목숨은 건다』(이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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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전도사로 한때 이름을 날렸던 방송인 정덕희 씨의 이력엔 ‘시인’이라는 직함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문학적인 견지에서 주목받진 않았지만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가 방송을 타면서 주부독자층의 인기를 얻은 비결에는 자신이 겪어온 인생유전의 ‘썰’이 4~50대 주부들에게 공감으로 먹혀들었고, 그들에게서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한남동 2백 평 저택 마님인 시어머니한테 반기를 들고 홀로서기위해 안전한 가정주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등 결코 평탄치 않았던 결혼생활과 35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 그 고난의 이야기에 특유의 입담과 보이스톤이 덧칠되었으니 부부생활이 조금씩 시큰둥해지고 몸과 마음이 나른한 여성들에게는 마치 자신을 일깨우는 구원의 말씀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런 정덕희 씨로부터 듣는 부부의 의미는 특별한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당연히 새로운 것은 없다. 다른 시인의 ‘부부론’도 마찬가진데, 표현만 조금씩 달리 했을 뿐 이미 다 아는 규정이고 지침들이다. 문정희 시인은 부부를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라며,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라고 결론지었다. 몇 해 전 늦장가 든 함민복 시인은 결혼 전 쓴 시에서 부부를 긴 상을 함께 들고 조심조심 문지방을 넘는 그런 사이라고 하였다.
서로 사랑은 하되 사랑으로 얽어매지는 말라는 칼릴 지브란의 잠언을 바탕으로 요리조리 변용한 말씀도 숱하게 많다. ‘하나일 수 없음에도/ 내 안의 당신이 되어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려 강요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나 아닌 당신이었다.’는 고백 또한 그 시행착오의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영원한 타인처럼 멀어지다가/ 다시금 내 속으로 파고드는/ 당신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나’임을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사이가 부부인 것이다.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 잔이다. 따라서 부부가 같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자” 이것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정덕희 씨의 싱거운 부부관계 노하우다. 둘(2)이 만나 하나(1)가 되는 것이 부부이고, 5월21일을 ‘부부의 날’로 제정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러구러 빚을 갚고 일수 찍듯 살아가는 것이 부부관계의 최선일지 모르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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