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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47) 낯선 감각의 영지 - 포옹 / 김행숙

오선민 2013. 6. 12. 10:01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47) 낯선 감각의 영지

 

 

포옹
 
김행숙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시인을 역사는 기억한다. 수없이 많은 시인들이 명멸하지만 살아남는 시인은 극소수다. 새로운 감동의 기제를 만들고 시의 넓이와 깊이를 개척한 시인의 고투는 시사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살아남는 시인의 공통점은 새롭다는 것이고, 그 새로움은 낯선 세계를 여는 찬연한 불빛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의 감각은 언제나 독자를 낯선 세계로 이끈다. 그곳에서 독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은 생의 층위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포옹」은 잘 알려진 시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시다. 한 번 읽고 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게 되는 시들이 많은데 김행숙의 시는 여러 번 곱씹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이 시에는 단 두 개의 문장만이 작품 안에 박혀 있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만 접근한다면 이 시는 의외로 쉽고 평이한 시로 읽힐 수도 있다.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와 “교차하였습니다”가 전부이다. 이 문장들이 시의 뼈대임에는 분명하나 이것으로만 시를 본다면 이는 매우 조야한 독법으로 텍스트의 눈빛 하나 슬쩍 보고 지나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들여다보자.

포옹은 사랑의 원초적 행위이다. 최대한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본능적 속성이다. 그러나 포옹은 완벽한 합체가 아니라 “검정”의 세계에 도달하는 동작이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대는 흑암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얼핏 시공의 무화를 경험하는 듯 하지만 포옹은 포옹 그 자체에 머물고 만다. 거리의 소멸이 사랑의 완성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포옹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포옹했지만 상대는 고작 “검정”의 사물일 뿐이다.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격렬하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사랑은 커다란 간극으로 비극의 입을 벌리고 “교차”하는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두 사람의 침묵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다. 이것이 사랑의 비극적 전모이며 숙명적 한계이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된다. 내부에 운명적 한계가 있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끝내 하나 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는 추락과 이별의 심해를 건너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듯 해도 비극의 틈새는 언제나 그 안에 내재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김행숙 시인의 낯선 감각으로 포옹은 새로운 색깔과 모양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눈 앞의 나무는 어제의 나무가 아닌 것이 되었고 낯선 세계는 다시 우리를 설렘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ㅡ출처: 문화저널2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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