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눈꺼풀 셔터 / 김정하 본문
눈꺼풀 셔터
김정하
사과의 갈변
발목을 감싸는 바람
왼손에 들린 비닐봉지 속 캔 맥주
작년 스웨터의 보푸라기
늦은 밤 기울어가는 가로등
잊었던 일기를 찾는 시기
어느 축제에서 내 손을 이끌던 첫사랑의 손이
지루하던 수업시간의 운동장
퇴근길에 오던 저녁약속 문자 메시지
미웠던 온도외의 화해
아무 글씨라도 어딘가에 적어보고 싶은 지금
은하계의 스위치를 껐다며 어둡다고 하는
지구 반대편의 타조대가리 시인
비오는 날 미끄러져 복숭아뼈까지 올라온
내 삼선 쓰레빠와 발에 붙은 은행잎
전화기 너머로 너의 목소리 뒤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읽다가 만 자기계발서가 고정된 페이지를 노출하고 있다
멈춰 있는 시계들이 건전지를 숨겨놓는다
시계를 혼내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내 안의 영혼이 무거워진다
지겹던 화형식이 끝나고 새살이 돋아난다
내 눈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그 위에서 삼각대를 펴놓고
다음 씬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시》2013년 11월호
------------
김정하 / 1988년 충주 출생. 2013년《시인동네》로 등단.
'좋은 시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소 씨의 외출 / 홍일표 (0) | 2013.12.22 |
---|---|
무릎이 빚은 둥근 각 / 이병일 (0) | 2013.12.22 |
물위의 간이역-다도해 / 서상만 (0) | 2013.12.13 |
달의 의자 / 김청수 (0) | 2013.12.04 |
미늘과의 포옹 / 한석호 (0) | 2013.11.29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