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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눈꺼풀 셔터 / 김정하

오선민 2013. 12. 22. 03:17

눈꺼풀 셔터

 

   김정하

 

 

 

사과의 갈변

발목을 감싸는 바람

왼손에 들린 비닐봉지 속 캔 맥주

작년 스웨터의 보푸라기

늦은 밤 기울어가는 가로등

잊었던 일기를 찾는 시기

어느 축제에서 내 손을 이끌던 첫사랑의 손이

지루하던 수업시간의 운동장

퇴근길에 오던 저녁약속 문자 메시지

미웠던 온도외의 화해

아무 글씨라도 어딘가에 적어보고 싶은 지금

은하계의 스위치를 껐다며 어둡다고 하는

지구 반대편의 타조대가리 시인

비오는 날 미끄러져 복숭아뼈까지 올라온

내 삼선 쓰레빠와 발에 붙은 은행잎

 

전화기 너머로 너의 목소리 뒤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읽다가 만 자기계발서가 고정된 페이지를 노출하고 있다

멈춰 있는 시계들이 건전지를 숨겨놓는다

시계를 혼내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내 안의 영혼이 무거워진다

지겹던 화형식이 끝나고 새살이 돋아난다

 

내 눈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그 위에서 삼각대를 펴놓고

다음 씬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시》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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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 1988년 충주 출생. 2013년《시인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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