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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문책 / 문정영 <유진의 시읽기>

오선민 2013. 12. 27. 18:23

서울일보/ 2013.12.26(목요일)

 

 

가 있는 풍경

 

 

문 책

문정영

 

 

기억은 이전의 나를 풀어내는 作業이나 반딧불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나의 잘못에 관한 것들은 5월의 맞바람을 적을 정도다

 

바람은 소리는 있으나 발음을 가지지 못하여 부딪치는 것의 입술을 따라간다

한쪽으로 치우친 침묵을 닮아 있다

 

나에 대한 문책은 침묵이다

부딪치는 것과 눈 마주치지 않는다

 

침묵은 다년생 풀잎에서 봇물이 흘러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풀린다

그간 나를 꾸짖던 바람을 베어 물 안 가득 넣어 두었다

새 떼의 발끝에 끌려나온 파문은 혀에 대한 문책이다

 

하늘 가장자리에 말줄임표를 찍으며 낮새들이 날아간다

 

내가 너무 많은 기억을 쓰는 날 責問 은 더욱 무겁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혼자 참아 내는 것이다

그간 나의 아가리는 너무 컸다. 컴컴하다.

 

 

시 읽기

너무 많은 기억은 마음을 번잡하게 만든다. 끔찍한 경험의 기억은 환청이나 환시로 나타나기도 하고. 혼자만 기억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가끔 회한과 뉘우침을 되살리기도 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기억으로 인해 물음이 많아지고, 변명이 많아진다면 집의 기둥보다 서까래가 더 굵은 격이 아닐까.

많은 기억이 밀려오는 밤. 어둡고 음침한 밤. 밝은 낮을 온몸에 가득 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새.......낮새들이 하늘 가장자리에 말줄임표를 찍으며 날아간다고 했다.

내가 너무 많은 기억을 쓰는 날 責問은 더욱 무겁다 /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혼자 참아 내는 것이다 / 그간 나의 아가리는 너무 컸다. 컴컴하다.

시인은 5월의 맞바람을 적을 정도로 많았던 말의 부딪침을 기억한다. 소리는 있으나 발음을 가지지 못하여 생긴 부딪침이다. 시인은 자신을 문책하며, 허언이 아닌 진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말들로 봇물이 흘러나갈 때까지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말은 밖으로 치닫고, 침묵은 안으로 치닫는다. 침묵이란 기억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과 번뇌, 망상, 분별들을 쉬게 하는 과정이다. 고통을 고통이 아님을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이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을 한껏 높일 수 있는 과정이다. 공허한 말, 삿된 말, 거친 말 등등 아상의 토대가 되는 말들을 줄이고, 내면을 고요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과거와 미래로 오락가락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기억을 없애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침묵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한편의 시,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끝자락에 더욱 돋보이는 시가 아닌가?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출처 : 유진& 선린대학 문예창작과정
글쓴이 : 유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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