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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두 편의 시를 고치며

오선민 2015. 4. 1. 11:46
두 편의 시를 고치며
-- '건너편의 풍경'과 '세상의 봄빛은'

강인한



시를 쓰는 일 못지 않게 일단 쓴 시를 다듬는 일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제오늘 두 편의 시를 손보았습니다. 먼저 '건너편의 풍경'의 초고를 여기 옮겨 봅니다.

내 눈 높이로 걸려 있는 나지막한 허공
능선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생각이 환하다
이 겨울엔 산도 생각이 맑아져
저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로 흐르는구나
고집스레 무성하던 초록의 의상을
가을 한철 다 벗어버리고
메마른 가지와 가지 사이로
홀연히 건너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나무들
오래 감춘 풍경을 왜 건네주는 것일까
달리는 차창 안의 나에게.

이것이 지난 1월 하순에 쓴 '건너편의 풍경' 전문입니다. 이 시는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버스에서 시상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며 바라본 풍경일 것입니다. 나지막한 산의 능선이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가운데 산등성이에 열 지어 서 있는 나무들― 낙엽을 다 떨구고 빈가지만 쳐들고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문득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잔가지 사이로 조금 더 먼 풍경도 아련하게 보였습니다. 만일 그 나무들이 칙칙한 이파리를 지닌 상록수였다면 아마 나무가 가린 그 건너편의 풍경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 나무들이 환하게 제 몸을 열어 저 건너편의 풍경을 내보이고 있구나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쳐 이 시를 쓰게 됐습니다. 생각이 트이지 않으면 자기를 쉽게 열어줄 수 없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연의 구분 없이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뭔가 미완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고성만 시인에게 이 시를 읽어본 소감을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시 같다는 충고를 들을 수 있었지요. 좀더 시일을 두고 고쳐야 할 시라고 그에게 고백하고 그로부터 거의 두 달을 방치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사 나는 이렇게 고쳤습니다.

내 눈 높이로 걸려있는 나지막한 허공

능선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생각이 환하다
이 겨울엔 산도 생각이 맑아져
저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로 흐르는구나

고집스레 무성하던 초록의 의상을
가을 한철 다 벗어버리고
메마른 가지와 가지 사이로
홀연히 건너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나무들

달리는 차창 안의 나에게.

첫 행 한 줄을 한 연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둘째 연은 능선 위의 환한 나무와 하늘 아래로 흐르는 겨울 산으로 생각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셋째 연은 건너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나무들에서 끊고, '나무들' 뒤에 이어지는 "오래 감춘 풍경을 왜 건네주는 것일까"를 너무 설명적인 것 같아서 아예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끝 행 한 줄을 넷째 연으로 독립시켰습니다.
이 시에서 나는 막힌 공간과 열린 공간, 수평으로 흐르는 산의 능선과 버스의 운행, 서 있는 나무들의 정지 상태와 달리는 버스의 동적 상태 이런 것들의 어울림을 은밀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가 된 건 "나무들의 생각이 환하다" 한 구절이었습니다.

어제 쓴 시가 '세상의 봄빛'인데 그 초고는 이러합니다.

굴거리나무 숲을 먼발치에 두고
원적암 가는 길
층층나무 자귀나무를 지나
늠름한 비자나무 푸른 어깨 사이로
곤줄박이 호르르 날리시고

돌돌거리는 여울 가에
하얗게 수줍은 콩제비꽃
햇볕 다냥한 산자락에는
새벽 별빛 서늘한 솜나물꽃도
어머니가 피우셨지요

우리 집 죽어 가는 화분
행운목 마른 줄기에 파아란 눈
어머니가 지난 밤 별빛으로 내려와
그 서럽게 파아란 눈도
어머니, 어머니가 틔우셨지요.

어느 잡지의 청탁을 받고 봄철에 맞는 시를 한 편 쓰려고 궁싯거리다가 이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으레 봄의 시라고 하면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버들강아지를 떠올리기가 십상이지요. 물론 그것들이 봄의 전령사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이미 닳아빠진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싫었습니다. 산 속 깊이 피는 우리 나라의 청초한 야생화로 봄을 피워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게 깊은 산중의 예쁜 콩제비꽃과 솜나물이었습니다. 콩제비꽃은 우리 나라 산과 들의 습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봄에 흰 꽃을 피우는데 화심 쪽에 콩알만큼의 보랏빛을 안고 있는 꽃입니다. 그리고 솜나물은 봄, 가을 두 차례 꽃을 피우는데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들국화 같은 별빛 모양의 흰 꽃잎이 애잔하고 조촐한 느낌을 줍니다. 곤줄박이는 눈 가장자리와 볼에 노란 크림빛 띠를 두르고 뒷머리와 부리 아래쪽은 까맣고 배는 붉은 갈색, 날개랑 꼬리는 푸르스름한 잿빛의 참새 비슷한 우리 나라 고산 지대에 사는 텃새입니다. 시나 산문에 그냥 이름 모를 산새라고만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표현이라는 생각에서 구체적인 산새를 골랐습니다.
이 시 속에 나오는 원적암은 내장산 골짜기 깊은 곳에 있는 암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자나무는 희귀종인데 원적암 가까이에 자라는 키가 큰 나무입니다. 콩제비꽃, 솜나물, 곤줄박이 이 모두는 정읍 내장산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나는 정읍이 고향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도 정읍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꽃나무를 잘 가꾸시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아들을 위해 별빛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행운목을 살려내고 봄을 피워주신다는 구상 아래 이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초고에서 마음에 걸리는 건 너무나 쉽게 작자의 의도가 빤히 드러나는 점이었습니다.

(…)늠름한 비자나무 푸른 어깨 사이로/ 곤줄박이 호르르 날리시고// (…)새벽 별빛 서늘한 솜나물꽃도/ 어머니가 피우셨지요//(…)그 서럽게 파아란 눈도/ 어머니, 어머니가 틔우셨지요.

시란 어쩌면 시인과 독자 사이에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숨기고 찾아내는 '숨은 그림 찾기'에 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초고에 '어머니'란 단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기도 했고 '별빛'이 "새벽 별빛 서늘한 솜나물꽃"과 "어머니가 지난 밤 별빛으로 내려와" 두 군데에 쓰인 게 거슬렸습니다. 또한 솜나물은 나물에 속하는 것이지 꽃이란 이름을 붙이기가 차마 어렵지 않나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솜나물꽃'에서 '꽃'을 떼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곧바로 이어지는 "어머니가 피우셨지요"는 더욱이 맞지 않는 표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의 제목 '세상의 봄빛'에 생각이 이르러 아무래도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세상의 봄빛은'이라고 고쳐야 좋을 듯했습니다. '세상의 봄빛은 어머니가 피워내셨지요?'라는 의미가 단축 표현되기 위해서는 '은'이라는 조사 하나를 더 필요로 한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의 끝맺음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의문문이 그냥 평서문으로 읽힐 수도 있으리라는 우려 때문에 망설이며 물음표를 찍을까 어쩔까 하다가 차라리 마침표를 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독자가 시의 결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의 봄빛을 어머니가 피워낸 것을 깨닫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소하고 자잘한 걱정을 지우고 덜어내며 다시 쓴 끝에 '세상의 봄빛은'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고쳐졌습니다.

굴거리나무 숲을 먼발치에 두고
원적암 가는 길
층층나무 자귀나무를 지나
늠름한 비자나무 푸른 어깨 사이로
곤줄박이 호르르 날리고

돌돌거리는 여울 가에
하얗게 수줍은 콩제비꽃
햇볕 다냥한 산자락에는
새벽 별빛 서늘한 솜나물도

우리 집 죽어 가는 화분
행운목 마른 줄기에 파아란 눈
어머니, 어머니가 지난 밤 하늘에서 내려와
그 서럽게 파아란 눈도
저를 위해 살그머니
맺어 놓으셨지요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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