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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가흠의 문인보 | 시인 서효인

오선민 2015. 4. 10. 10:04

백가흠의 문인보 | 시인 서효인

                                     글 백가흠,  사진 백다흠 

 

 

ㆍ정면으로 날아드는 타자의 삶을 피하지 않는 ‘시인 포수’

2008년 겨울, 그가 서울에 나타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으레 신인의 등장이 신선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이거니와, 더군다나 걸출한 시인의 출현이 밋밋하기도 힘든 일이겠지만, 시인 서효인의 등장은 존재감에 있어선 으뜸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풍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당당했다. 시인으론 드물게 전장의 장수처럼 머리가 좀 크고 눈썹이 짙고 굵다. 눈은 가늘게 찢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렇듯 그도 곱슬머리다. 말을 할 때마다 사투리를 감추려 애쓰지만 그가 목포에서 나고 자라 광주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억양이 남았다.

기억 속, 그의 맨 처음은 이십대 중반 상경, 생경한 서울에 적응하려 무던히 애쓰던 모습이다. 짠했다. 6년이 지난 지금, 그사이 그도 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지나갔고,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햇수를 세어보니 6년밖에 지나지 않아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다시 헤아리길 여러 번이었다. 그와의 기억이 많다는 얘기다.

 


 

▲ 말 재미있게 하는 시인, 드물지 않던가
그는 말꾼이다. 말이 가진 습성을 잘 알고 있다
신문에서 보는 산문도 따뜻한 품성이 그대로다


우리는 5년 넘게 주말마다 야구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야구장에서 만나 캐치볼을 한다. 그도 나도 기아타이거즈 팬이다. 우리는 2009년 기아타이거즈가 나지완 선수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할 때 TV 앞에 함께 앉아 있었다. 12년 만의 우승이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막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연희문학창작촌에서였는데, 당시에 그는 창작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어렵게 잡은 직장이었다. 우리는 가끔 창작촌 소나무숲에서 전두환씨 집 담을 옆에 두고 캐치볼을 했다. 그 집 담장 너머로 홈런을 치고 싶었으나, 공을 넘기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야구와 인연이 깊다고 해서 물으니, 전남대를 다니는 내내 광주구장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중학교 때까진 선수였어요, 같은 꿈이 좌절된 비운의 사연일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웠다. 나는 쌍방울 시절, 전주구장의 내야그물을 타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런 인연이라면 내가 더 깊다.

그는 유능한 포수가 되고 싶어 했다. 너무 늦은 꿈이었다. 포수는 힘들어 모두 꺼리는 포지션이다. 한 게임을 뛰면 대략 200번은 앉았다 일어나야만 하고, 내동 쭈그려 앉아있어 무릎에 금방 무리가 가는, 나 같은 인간은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자리다. 당시 그는 팀에서 막내 격이었는데,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의 성향이 그런 것처럼 보였다. 모두 꺼리고 힘든 것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그지만 여전히 내겐 포수 효인이다.

야구에서 포수란 어떤 존재의 인간인가. 실수는 치명적이며, 꼭 이루어야 할 성공이란 본전인 사람이다. 본전을 꿈꾸는 사람이 없는 시대, 그는 겨우 본전만을 꿈꾸는 사람이다. 야구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공을 받는다는 것, 정면으로 날아드는 공을 잡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타인의 위태로움을 잡아채는 일과 같다. 빗겨난 인생이 뒤로 빠지지 않게, 흘러가지 않게 막는 일, 정면으로 날아드는 타자(他者)의 삶을 피하지 않는 것, 시인 포수 서효인의 순정이다. 타인의 삶을 건져내야만 하는 의무, 남을 위해 배려하는 포지션이다. 그의 첫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민음사)의 시가 바로 그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몸을 아끼지 않으니 그의 유니폼은 언제나 너덜너덜하다. 그는 슬라이딩을 배운 적 없으나 베이스를 향해 돌진한다. 솔직하게 그 모습을 보자면 슬라이딩을 한다기보다 베이스 근처에서 넘어지거나 굴러간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는 열심히 뛰어도 매번 한발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러지 않아도 되련만 그는 여전히 몸을 날리고 유니폼은 걸레처럼 찢어지고 팔꿈치나 무릎은 까지기 일쑤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냥. 대신 크게 다치지만 마라, 고작 우리의 충고는 이런 것뿐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뛰는 그를 우리가 도울 일이란 말뿐이다. 그렇다, 헌신하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오직 말뿐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유머와 입담은 물론이고, 그가 쓴 산문에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였다. 시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다. 소설을 써도 좋겠다는 것이다. 말 재미있게 하는 시인, 드물지 않던가. 그는 구수한 사투리에 질퍽한 리얼리즘 같은 시를 쓸 것 같지만 그의 시는 세련되고 굉장히 모던한 폼을 지니고 있다. 더 이상은 잘 모르니 각설하고, 그의 산문, 나는 그의 산문을 좋아한다.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짧은 분량 안에 위트나 유머가 가득하고, 삶에 대한 애잔한 시선도 놓치지 않는다. 종종 신문에서 보는 산문에도 일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품성이 그대로다. 웃기기도 하고 슬픈 것이 동시다.

그는 말꾼이다. 말이 가진 습성을 잘 알고 있다. 돌고 돌아갈 때도 있고, 직선으로 날아갈 때도 있는 말의 습성을 잘 아니, 산문이 감동적인 것이다. 나는 그가 좋은 소설가가 될지 어떨지는 전혀 모르나, 훌륭한 산문쟁이는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딸에 대한 글을 읽을 때면 더욱 그렇다. 그는 작년에 예쁜 딸 은재를 얻었는데, 장애를 안고 있었고, 처음엔 많이 아팠다. 여전히 우리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위로도 축하도 모두 말뿐이었다. 우리는 그의 막막함을 짐작할 길 없었다. 축하한다, 말하고 싶었으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편견이란 것은 그렇게 결정적일 때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그가 은재에 대해 여러 감정의 소고를 솔직하게 밝힌 글을 읽으며 조금 내 자신이 창피했던가. 조금 울었던가. 그와 아내와 은재가 좀, 아름다웠다.

그는 얼마 전 파주로 이사했다. 고향집에서 음식이 올라왔는데, 양은 부족해도 같이 나누어 먹자며 시합 전에 야구팀을 초대했다.

출세했다, 야. 서울 올라온 지 6년도 안돼 아파트로 이사도 하고.

널찍한 아파트에 들어서며 축하를 건넸다. 은재는 잘생긴 남자를 알아보는 지조 있는 애기였다. 우리 형제를 좋아했다는 말. 말과는 달리 한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귀한 민어회, 접시보다 큰 보리굴비, 보쌈과 전라도김치, 각종 나물, 무엇보다 그의 아내가 ‘직접 끓인’ 조개된장국과 갓김치의 조합은 환상이었다. 나오는 길에 김치를 털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은재의 돌잔치도 있었다. 그날도 배 터지게 밥을 얻어먹었다.

그는 요즘 자꾸 뭔가를 내놓고 나는 얻어먹는다. 그가 좋은 글쟁이가 될 게 분명하다.

▲ 서효인
198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06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했으며 지금까지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2010)과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2011) 등 두 권의 시집을 냈다.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으로 제30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야구 좋아하기로 소문난 그는 문인 야구팀 ‘구인회’에서 주로 포수를 맡고 있다. 2011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야구에 대한 애정과 추억을 담은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다산책방)를 펴냈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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