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 <시와소금> 2015 하반기 신인문학상 김루카(김은호)당선작//알림방 본문
▪ <시와소금> 2015 하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2)
슈나우저*를 읽다 외 4편
김은호
텃밭 가장자리를 곡괭이로 파서 열고 흰 무명천에 책을 싸서 묻는다
삽으로 흙을 뿌려 덮으며 흰머리멧새 울음소리도 몇 송이 얹혀준다
오랫동안 읽었던 부드럽고 따듯한 이야기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사방팔방 무너져 내려 집에 쌀 팔 돈조차 없던 때
길에서 주워온 슈나우저 한 권
검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표지에 반짝반짝 두 개의 별이 박힌 책
첫 장부터 끝까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풍성한 수염 출렁거리던
가끔 붉은 혀로 세상을 핥아주거나 컹컹 꾸짖을 줄도 아는
슈나우저는 따뜻한 난로가 부록으로 묶인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쾌한 문장들 쏟아지고
우리 집 웃음소리 굴뚝처럼 높아갔다
책과 독자 사이를 오가던 수많은 사연 잿빛으로 물든 날
‘우리 함께 고통을 이겨냈어요’ 이별의 장을 앞발로 버티며
너덜너덜 노래하던 책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온 통증이 죽음까지 내달았다
열심히 나를 뒤적거렸지만 슈나우저 한 권 찾아내지 못했다
일상의 책장에 꽂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슈나우저만도 못한 파본破本이었다
*슈나우저(schnauzer) : 독일 원산 반려견의 한 품종
투명인간
지퍼를 세게 올린다. 비뚤어진 감정이 목젖을 물어뜯는다.
점퍼 속에 오리 울음이 가득하다.
점퍼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싸구려 방식을 향해 삼거리 편의점 불빛이 컹컹 짖는다.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오리의 꿈이 식어간다.
내가 기르던 오리들이 모두 객사했다. 비가 오면 공룡은 우산을 삼켜 버린다.
툭 하면 뒤통수치는 세상, 뛰어봐야 한통속 애인이 먹여주는 밥에서 공룡의 똥냄새가 난다.
세수할 때 콧구멍을 찌르는 새끼손가락, 약속 같은 것은 하지 마! 허기로 쌓아올린 벽이 쩍, 입 벌리면 죽은 시계나 던져줘라.
아스팔트 위에 오리들이 쏟아진다. 물음표에 부딪혀 죽은 어머니를 업고 빙빙 돈다.
넘어간 트럭 짐칸에서 붉은 달이 떠오른다.
눈물은 어디서부터 단단한 뼈가 되는지 내 중심은 왜 이렇게 물컹물컹한지 평생 뒤뚱거렸으나 어제가 떨어지지 않는다.
빌딩 높이로 쌓이는 어둠의 네모난 입들이 꽥꽥거린다.
구름공동묘지
새가 사라졌다
유리창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새
나는 그것을 새가 깨졌다고 읽는다
오그라든 발이 제 마지막 울음을 움켜쥐고 있다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허공에서 보낸 한철을 뱉어내는
죽은 새를 손에 들고 구름을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파닥거린다
물음표를 물고 사라지는
모든 눈 깜짝할 새를 위하여
구름에 새를 묻어 준다
노을의 피가 소복에 배어 나온다
구름 공동묘지에는
날개 없이 날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덮여있다
이별을 오래 만지작거리면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깨어지지 않으려고 부르는 노래,
직박구리 같은 새의 울음에서는
못으로 유리 긁는 소리가 난다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듣는 저녁
산길을 내려오다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몰랐지만
그것은 노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
또 어쩌면, 말 못할 서러움을
오래 삭힌 노래일 것도 같았습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샘솟듯
허공을 토해내는 소리에
저물던 산이 휘청거리고
구름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눈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 어떤 울음도 꺾지 않으렵니다
출렁이는 어깨 위에 조각배 같은
손 하나 얹혀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음소리 난 곳 돌아다보는 나를
숨어 바라볼지도 모르는 눈
그 샘물에 나를 씻고 싶었습니다
며칠 후,
숲에서 다시 그 소리 들렸습니다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산짐승 울음소리 뒤 저 바깥세상에는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홀로
눈물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 그림자 밟으며 봄날은 멀어져가고
울음을 잘 배우고 싶은 저녁입니다
낙타, 산으로 가다
명지산* 기슭에 낙타 떼가 나타났습니다
산 전체가 한 마리 커다란 낙타로 옷 갈아입었습니다
낙타 빛깔로 물든 낙엽송들, 그 빛깔과 냄새, 부드러움이
촘촘히 잘 짜인 한 필의 카멜텍스입니다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울던 가수 배호,
스물아홉에 죽음의 사막으로 간 그의
낙타 울음 같은 노래가 요즘 들어 자주 들려옵니다
아직도 그는 모래알을 씹으며
바위 같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요
바스러진 내 나이를 바라보면
터벅터벅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가 보입니다
오래전 신기루에 부딪혀 죽은 내 뼈들이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합니다
낙타 눈처럼 슬픔에도 높은 연비가 있다면
나는 시간을 등짐 지고 어느 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별빛 내린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서 잠들 수 있을까요?
낙타 등에 실린 노래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오늘은 나도 쌍봉낙타 타고 가는 가수입니다
*명지산 :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있는 해발 1,267M의 산
당선소감
소금 같은 시를 위하여
김 은 호
‘난 이래서 시가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가 있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시야'
―영화 ‘비긴 어게인’의 대사 중, ‘음악’을 ‘시’로 바꾸어 쓴 글
오랫동안 시와 거리가 먼 곳에서 지냈다. 몸에 맞지 않는 작고 요란한 옷을 입은 내가 많이 낯설었다.
내가 겪은 모든 고통과 음악을 가방에 담고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내 안에 시 흐르는 소리 듣는다. 가평 명지산 계곡 옆에 나를 심은 후였다.
언어에 맛을 내는 소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소금 자루를 메고 삶의 식탁을 찾아가는 이제 나는 소금장수다.
시간의 강물을 건너다보면 소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맛인 소금의 맛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내 시에 좋은 울림통을 달아주신 《시와소금》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살아가는 이 땅에 훌륭한 시인들, 문우들께 감사드린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가득한 가평성당 교우들께도 인사드린다. ‘샬롬!’
내 시의 비평가인 아내에게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의 시에 곡을 붙인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를 들려주면 내 시에도 좀 좋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김은호_ 경남 진해(창원시)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종합상사 파나마 주재원.
홍콩에서 무역업.
현재,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 거주
전자주소 : guapo1013@hanmail.net
심사평
묘사와 진술 사이에서
매월 몇 십 권의 시집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만큼 시인이 많다는 뜻이어서 일견 뿌듯하다. 그런데도 시가 푸대접을 받는 시대다. 시가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고 시인의 전유물로 전락한 요즘 사태가 심각하다.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은데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이를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결국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하는 요인은 분명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하겠다. 분별없는 언어의 나열, 과대한 망상과 신변잡기식의 관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상상과 익히 보아온 흔한 소재의 차용 등―도무지 시에 대한 깊은 맛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언어의 유희, 현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향기 없는 무슨 암호와 같은 기호의 범람을 새로운 시라고 치부한다. 또 하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보고 느끼는 대로 쓰는 안일한 표현과 서정으로 전혀 새로움을 찾아보지 못하는 것이 독자와의 간극을 더욱 벌여놓고 결국은 시를 외면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제부터라도 시의 감동성을 회복하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과 참신한 언어의 미학을 보여준다면 분명 시를 외면한 독자도 다시 시를 읽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이런 믿음에 기대를 거는 것이 신인상이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일에서도 본지 신인상에 응모한 시인이 있었다.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심사자들이 세심하게 작품들을 며칠을 두고 독해하였다. 그 결과는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많은 응모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선명하지 않았고 시적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장악하지 못하여 겉치레를 한 작품들도 많았다. 또한 의도적으로 언어를 비트는 등 기교에만 치우친, 이른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시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자연풍광이나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일기처럼 쉽게 쓴 단순한 시들도 많았다.
시조와 동시 부분에서는 최종심에서 거론될 만한 수준작들이 없어서 이번 신인상에서는 뽑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평론부분에서는 창간 4년차에 접어든 시점이라 웬만하면 당선작을 내기로 마음먹었으나 응모한 평론들이 심사자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응모작 대부분의 문장력이 부족했으며, 또한 시를 바라보는 눈이 한쪽(의미)으로만 치우쳐 있어서 아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글의 체계성 확립에도 많은 수련이 요구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시 부문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작품들이 있어서 행복한 시 읽기를 할 수 있었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돌려라 돌려라」 외 9편, 「팽나무 아래의 밤」 외 9편, 「편지」 외 9편, 「바느질의 달인」 외 9편, 「비 온 뒤 우울」 외 9편, 「물의 전집」 외 14편, 「도마, 도맛밥」 외 9편, 「여인이 만들어낸 하루」 외 9편, 「슈나우저를 읽다」 외 9편, 「마령」 외 9편, 「화장」 외 9편, 「햇살」 외 9편이 최종심 대상 작품들이었다.
위에 거론된 작품들은 삶과 밀접한 언어구사로 나름대로의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시를 시답게 만드는 기폭장치를 시의 행간에 녹여내고 있었다. 또 새로운 시 창작방법의 시도와 풍성한 언어의 미적 감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어렵게 당선자를 내기로 하였다.
「물의 전집」 외 14편을 응모한 김이솝은 풍성한 언어구사를 통해 시가 묘사로 시작해 진술로 끝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시적 전개가 거침없이 활달하여 막힘이 없었고 전체적인 전개구조도 흠잡을 데 없었다. 이 작품 외에 「입체적인 책」「흩날리는 세계」「봄비를 듣다」 등의 좋은 작품이 당선작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앞날에 대한 믿음이 컸다.
「슈나우저를 읽다」 외 9편을 응모한 김은호는 삶에 깊이 뿌린 시적 재능과 어느 대상이든 시로 형상화하는 기법에 확신이 갔다.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중간에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적 리듬을 갖고 있었다. 다만 늦깎이의 등단으로 앞으로 각고의 정진이 없다면 시적 성취를 이루는데 한계가 있다는 우려를 안고 있었다.
시는 인간의 가치와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 당선자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이제 시단에 이름을 내민다. 이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시를 시답게 만드는 감동성 회복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첫 눈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 참신한 언어의 구사, 그리고 함부로 흉내 내지 못할 새로운 상상력으로 시단의 큰 기쁨이 되어야할 것이다.
두 당선자에게는 박수를, 아깝게 선에 들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는 가까운 시일 내에 시단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함께 보낸다.
―심사위원 : 공광규, 박해림, 서범석, 이영춘, 이화주, 임동윤(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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