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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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좋은 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들 / 황학주

오선민 2016. 5. 11. 09:09

 

좋은 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들

 

ㅡ 황학주

 

 

 

1. 체험과 상상력

 

시인을 빨리 말하면 신이 되지만 신은 시인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정일 은 시 <쉬인>에서 계획에는 없었지만 나는 최후로 만들어지고 그러자 세계는 곧바로 수라장이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제멋대로 펜대를 운전하는 거지같은 시인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태어나자 세상이 수라장이 되었다고 한 장정일은 그러면 시인을 파괴자로 본 것인가요? 아니지요.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제2의 창조자로 보았던 거지요.

그러면 시인은 무엇을 가지고 창조를 하나요?

저 같은 사람은 무얼 가지고 시를 쓰죠?” 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연애도 못해 보고, 그래서 죽음 같은 실연을 당해본적이 없고, 전기철 시인처럼 서울역에서 노숙도 못해 보고, 배낭여행을 다닌 적도 없고……

우리는 문학을 체험의 산물이라고도 하고, 상상력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문학은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것이며,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체험이 적으면 상상력을 키우면 되고, 상상력이 적으면 체험을 키우면 됩니다.

그런데 문학적 체험이란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주체적인 자기양식적인 인식 혹은 거기서 얻어진 의미를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구체성의 문제가 대두되지요. 대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 일어나야 살아 있는 체험이 되겠지요.

짝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커다란 흠모요 지독한 열정이요 죽도록 한사람만 바라보는 순정일지라도 우리는 짝사랑을 사랑이라 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인격적 접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소외되지 않은 접촉

 

좋은 시를 얻으려면 소외되지 않은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우리시대의 소외현상에 대해서 아주 쉽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가 예로 든 것이 세탁기와 사진기입니다.

 

 

3. 본다는 것- 감각적, 분석적

 

대상이나 사물을 마치 얼굴이나 몸을 보듯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본다는 것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나 몸을 보듯이 볼 수만 있다면 사물에 대한 감각적 관찰, 분석적 관찰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작은 결점이라도 우리는 얼굴이나 몸에 있는 흠을 곧장 알아봅니다. 마치 지도를 그리는 사람처럼 코가 조금 들어갔다든지 잘 생기긴 했지만 어딘가 좀 천박하다든지 윗입술이 조금 두툼하든지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사실입니다. 배에 살이 조금 있는 것하고 없는 것을 정확하게 구별해냅니다. 분석적 민첩성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걸 구별해낼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느낌, 반응, 내가 취해야 할 태도 같은 것도 곧바로 결정해버립니다.

보세요. 톨스토이는 자기처럼 넓은 코, 두꺼운 입술, 작은 눈을 가진 남자에게는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단지 내가 못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겐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미래, 세상관, 인생관까지를 결정해버립니다. 본다는 것의 구조, 얼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좋은 일화라 하겠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본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객체가 되어 누구엔가 보인다는 것 사이에 예술, 예술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문학의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다르게 본다는 뜻이고 다르게 본다는 것은 미적 인식을 가지고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엔 정신의 작용이 포함됩니다. 습관, 인식, 사상, 인격 등이 포함되어 본다는 행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르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하고 실제로 남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혹 남과 다르게 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은 해야 합니다.

철학에서 미란 성찰의 대상이고요, 자본주의는 미를 상품으로 보는데, 누가 미인인가요? 미인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어떤 유명한 모델 에이전시에게 물었어요. 어떤 사람이 미인이냐? 그가 대답하기를……

 

 

4. 수집벽은 예술의 적

 

수집가가 되지 마세요. 인형을 모으고 예쁜 찻잔을 모으고 그림을 모으는 이런 일을 그만 두세요. 예술은 컬렉션이 아닙니다. 심지어 지나간 옛사랑의 흔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수집벽은 자신의 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인이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 수상 후 첫 장편을 냈지요. 순수 박물관이라는 작품입니다. 케말과 퓌순의 짧은 사랑이 지나가고,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케말이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모아 박물관을 짓는다는 내용의 소설인데요. 그래서 케말은 사랑의 수집가가 되었지만 사랑의 시인은 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무언가가 내 시에 등장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둬야 합니다. 같은 내용, 같은 생각,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끝없이 모으고 계시지 마세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려는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 시 속에 끌고 들어오려는 것으로부터 내 자신이 벗어날 수 있도록 유의하십시오. 잠옷을 모으는 사람이 있어요. 잠옷을 왜 모으지요?

 

 

5. 내 속에 있는 거울

 

모든 시인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틀이 있다면 그건 예술이 아닙니다. 누가 사막을 주제로 한 시를 발표했어요. 시 속에 사막, 모래바람, 오아시스, 낙타 이런 게 다 등장합니다. 내 속에 이미 사막을 비추는 거울이 놓여 있는 거지요. 사막을 그런 식으로만 보이게 하는 거울을 치워버려야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거울을 깨뜨리면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6. 이제 조립은 그만

 

누가 보내온 책을 뒤적뒤적 하다 눈에 띄는 제목이 있어서 봤어요. 글 제목이 류시화는 혹시 가짜가 아닐까?”라는 거였어요. 1980년대 류시화는 안재찬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썼지요. 굉장히 상상력이 뛰어난 시인이라는 정평이 있었지요. 어느 날부터 시를 쓰지 않더니 인도나 인디언 마을을 다니며 수행자가 되었고 그 후 류시화라는 이름으로 주로 명상계열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런데 그 책에서 글쓴이가 류시화가 혹시 가짜가 아닌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은 류시화가 수행자로서 지나치게 행복하다, 라는 거였어요. 말하자면 오랜 수행을 통해 운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 그의 글에선 일상적인 반찬이 되어 올라온다는 지적을 했지요. 그래서 그게 조립품이다, 라는 결론을 낸 거예요.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믿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조립전문가다, 라는 말을 해놓았어요. 전 류시화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해서 동의도 반대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네 글은 조립품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은 예술가로서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구요. 우리 누구도 누군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우리가 시로써 가려는 길도 누군가 디딤돌을 놓아놓은 길을 가려는 것인 것은 분명하지만, 좋은 시인이 되려면 조립을 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7. 진짜를 좋아하라

 

진한 향수, 진한 화장품, 냉장고의 탈취제, 화장실의 방향제.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후각을 마비시킵니다. 냉장고에선 냉장고 냄새가 나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게 심하면 청소를 자주 해주면 됩니다. 언제나 인공향에 길들여 있으면 실제 냄새를 맡을 때 뇌가 거부하지요. 장미 인공향에 길들여지면 실제 장미꽃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습니다. 오감 안테나가 작동을 안 합니다. 시인에겐 치명적입니다.

전화통화 같은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유의해야 합니다. 일종의 가상 체험인데요. 가상체험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뇌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전화로 밤새 사랑한다고 난리쳐도……

 

 

8.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여행

 

예전엔 정착이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떠남이 문제. 많은 사람이 떠나고 배낭여행을 가고 법정스님은 내면의 세계로 떠나라 하고 누군 망각 속으로 떠나라 합니다. 랭보처럼 진부함과 천편일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타락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탈주이며 여행이지요. 결혼도 떠남이고 이혼도 떠남입니다. 익숙한 존재와 세계로부터, 자기로부터 떠나 가장 멀리 있는 자기에게로, 억압된 자기로부터 자유로운 자기로 떠나야 합니다. 예술이야말로 존재와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찾기 위해 쉼 없이 떠나는 인간의 총체적 노력입니다. 여행하고 끝없이 방황하라.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했습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현대인의 자기선언이자 시인의 자기선언이라 할 만합니다.

 

9. 아프리카와 나의 시

 

10. 아프리카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아시낭모

 

아프리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태생적으로 문인들은 대개 지성인이고 사회참여적이며 현실 비판적이며 식민주의에 저항하고, 지금도 반정부인사들이 대부분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소잉카나 응구기가 모두 옥중생활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지만 지금도 그들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언제나 신변안전을 걱정하며 살고 있는 종족입니다. 우리 시인들은 그들의 친구입니다. 문우입니다.

탄자니아에서는 스와힐리어가 국어이자 공식어입니다. 케냐와 우간다 등에서 스와힐리어는 제1통용어입니다. 그것은 아프리카 고유어이며 그들 조상의 언어이지요. 그러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냥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언어 하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위대한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작가들이 자국 내에서 영어나 불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적으론 자기 언어를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의 언어로 그들 자신을 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77년에 응구기는 영어와 작별을 고하고 그 후 자기 조상어인 키쿠유어를 사용해 모든 글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영웅적인 작가의 귀환이다, 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수세기 동안 아프리카어로 글을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스와힐리어로 글을 쓰는 동아프리카의 신화적인 시인 샤반 로버트. 그리고 줄루어, 요루바어, 아랍어, 암하릭어로 쓰인 저작들이 있습니다. 부족들에겐 각각 자기 부족어가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생물학적 국적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신의 언어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 간의 갈등이나 민족 간의 갈등도 고정된 어떤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언어란 단순한 말의 배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아이들과 오래 놀다보니 그들의 언어와 언어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자기 언어가 지닌 어떤 함축미를 자연스럽게 터득합니다. 한 단어가 가진 의미와 뉘앙스의 차이를 아는 거지요.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를 초월하기에 내가 사전을 놓고 스와힐리어를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알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때때로 말의 의미보다 음악성이 더 우위에 있어서 흥얼거리는 것만으로 그들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만 나는 스와힐리어를 안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진정한 학교는 그들이 사는 집과 놀이터와 거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영어나 불어를 쓰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교육받는 언어와 자기가 자란 문화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두 가지 가치체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그들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져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식민지 시절 초등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했듯 그들도 스와힐리어나 기큐유어를 쓰다 적발되면 사탕수수 막대기로 엉덩이 맨살을 맞았으며 나는 바보 멍텅구리다라고 쓰인 철판을 하루 종일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기쿠유어를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10년 동안 투옥생활을 해야만 했던 가카라 와 왕자우.

아프리카 대륙의 민족적 유산인 아프리카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프리카 농민, 혹은 유목민들 덕분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국적에 대한 아무런 소속감 없이 시골에서 그저 자신의 언어를 쓰고 살았습니다.

물론 수입문학! 아프리카에도 식민교육에 의해서 셰익스피어나 괴테 발자크, 톨스토이 같은 위대한 인문주의 전통이 수립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위대한 인문주의 전통을 비추는 상상력이 놓인 거울의 위치가 항상 유럽이기 때문입지요. 위대한 인문주의 전통은 그 거울을 통해 굴절된 것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라는 모국어를 위해 복무했고, 푸시킨과 톨스토이는 러시아어를 위해 복무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작가들도 그들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자신의 모국에 복무해야 하고 그들 언어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아프리카 문학의 미래는 아프리카어에 시간과 재능을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열적인 작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아프리카어를 다른 아프리카어로 번역할 수 있는 열정적인 번역가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언어정책과는 별개로 자신의 언어로 문학을 하는 작가들을 뚝심 있게 지원해 줄 수 있는 출판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조금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시낭모를 만들었습니다.

 

 

출처 : 유진& 선린대학 문예창작과정
글쓴이 : 유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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