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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 창작과 비평 / 오세영

오선민 2016. 5. 11. 09:17

 

시 창작과 비평

                            오세영(시인,서울대 교수 )

 

 

한 시인이 작품을 이루어내는 전체 과정은 크게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원칙적인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실현적인 측면이다. 전자는 생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시의 영감을 솟구치게 하는 정신의 어떤 샘물에, 후자는 그것에 가시적으로 형상화시킨 구체적인 언어 형식, 즉 쟁반에 오른 한 그릇의 물에 비유될 수 있다.

시 창작이란 원천에서 솟구쳐오르는 이 시의 샘물을 하나의 정교한 그릇 ㅡ 클리언즈 부룩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자항아리"에 담아 식탁에 내놓는 과정이다. 여기서 "원천의 솟구쳐 오르는 샘물"이란 그것을 영감이라 부르든 혹은 포에지라 부르든 언어화되기 이전의 어떤 정신적인 상태를 "그릇에 담겨진 샘물"이란 언어화된 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제3의 단계가 있다. 그것은 자연의 상태인 샘물을 떠 그릇에 담고자 하는 충동 ㅡ 그러니까 갈증에 대한 인지와 그것을 해갈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아무리 신선하고 맑은 샘물일지라도 그릇에 담겨지지 않는다면 한낱 무위 자연의 일부, 의미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샘물이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갈증을 느낀 사람이 식수로 인식, 그것을 마시려 드는 순간이다. 이때 자연의 일부로서 땅 밑에서 솟는 샘물은 비로소 식수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의미화는 구체적으로 그릇에 물을 뜨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물을 먹는 과정은 ① 자연상태의 샘솟는 물, ② 갈증의 인식과 그 해갈의 충동, ③ 그릇에 담긴 물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 창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편의상 이 세 단계를 나는 ① 시의 원천, ② 시의식, ③ 시적 형상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① 이 시 창작의 원천적인 측면에 해당한다면 ③ 은 실현적인 측면에 ② 는 의미화의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① 우선 시의 원천의 경우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아무 곳이나 땅을 파서 물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시의 원천 역시 아무 사람이나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 선천적으로 시의 원천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의 경우는 아마도 훌륭한 시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전혀 시를 쓸 수 없다는 뜻이 물론 아니다. 누구나 시는 쓸 수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을 편의상 우리가 시인이라 칭한다면 아무나 또한 시인이 될 수는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의 원천을 지니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다만 훌륭한 시를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학을 동류의 것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는 그것을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에 대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구나 한 곡조쯤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음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그 사실 하나로서 그를 '가수'라 하지 않는다. 누구나 종이에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미술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전문적인 시인, 혹은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의 조건으로써 풍요롭고 심원한 시의 원천을 생리적으로 가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둘째, 시의 원천을 지녔다 하더라도 지닌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계발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수맥 그 자체가 샘물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의 실용적인 샘물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파 수맥의 물꼬를 트고이로써 물이 솟아오르도록 해야 한다. 시 원천의 경우 이것은 시인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질 터이다. 그렇다면 시의 원천은 어떻게 계발할 수 있을 것인가. 매우 상식적이지만 그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즉 좋은 저서를 두루 읽고, 인생의 많은 체험을 쌓아야 하며, 깊이 있는 사색을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독서란 그것이 좋은 내용의 책이든 나쁜 내용의 책이든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좋은 책에서는 좋은 내용을 받아들이고 나쁜 책에선 비판적인 내용을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혹자는 나쁜 책은 나쁜 영향을 주니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소아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훌륭한 시인이 될 자질이 없으므로 예외에 속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독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을 담은 저서를 우선 기초로 삼아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 진실의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내적 세계가 확충된 연후에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전문적인 내용의 저서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정신의 편견이나 불구성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을 담은 저서'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이 흔히'고전(classic)' 혹은 '세계문학(world literature)'이라 부르는 것은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인이 되기 위하여 꼭 읽어야 할 저서는 위대한 종교의 경전들이다.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여러 경전, 이슬람의「코란」그리고 종교의 경전이라 할 수는 없으나 사서삼경, 우리의 「삼국유사」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원천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생체험과 깊이 있는 사색 또는 독서 못지 않게 중요하다. 우선 체험은 그것이 기억으로 남아 있든 혹은 무의식의 세계에 참전해 있든 시인의 내면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면서 우연히 구사하는 한 개이 단어, 하나의 에피소드는 사실 그의 과거체험이 무의식 속에 용해되어 있다가 그의 독서체험과 어울려 상상력의 힘으로 토로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평소에 시인이 깊이 있는 사고와 묵상에 자주 드는 것은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시인은 사색을 통해 독서 및 체험에서 얻어진 가치들을 정리 체계화하고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정립하며 시작의 힘이라 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원천에 대한 이 같은 정기적이고도 근원적인 계발이 없이 단기적인 학습이나 글 쓰기 훈련 따위로 시 창작의 효과를기대한다는 것은 무용하다. 그것은 마치 위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양제를 투약하는 행위와 진배 없다.

 

② 시 의식의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력이다.

관찰은 다시 통찰(insgt)과 깨우침(realizing)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통찰은 넓은 의미의 관찰(observation)과 혼동하기 쉽지만 전혀 다른 정신행위이다. 관찰이 대상, 즉 개관의 외면 혹은 현상을 주시하는 정신 행위라 한다면 통찰은 이와 달리 대상의 내면 혹은 실재를 들여다보는 행위이고 관찰이 대상을 분석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유기적 관계성을 토대로 사물을 이해하려는 행위인 것과 달리 통찰은 대상을 처음부터 전체로 인식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관찰은 객관적이지만 통찰은 주관적이다. 한편 관찰은 이성을 통해, 통찰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전자가 우리의 인식대상에 어떤 이해 즉 철학적으로 '오성(understanding)'이라 부르는 것을 가져온다면 후자는 어떤 깨우침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 즉 주체는 대상 혹은 객관을 만나거나 수용함에 있어 두 가지의 정신 경로를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관찰을 통해서 이성으로 대상의 객관적 의미 즉 외면을 이해하는 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통찰을 통해서 직관으로 대상의 주관적 의미 즉 그 실제를 깨우치는 행위이다. 우리는 전자의 정신활동을 과학이라 부르고 후자의 정신활동은 문학(혹은 종교)이라 부른다. 과학은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이성에 의하여 사물의 어떤 보편적이고도 논리적인 법칙을 찾아내지만 문학은 직관에 의하여 어떤 총체적이고도 모순된 삶의 진실을 깨우친다. 여기서 문학은 사물 혹은 인생을 단지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을 넘어서 어떤 인생론적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정신활동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문학이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직관의 산물이며 세계를 객관적으로 대면하려 하기보다는 주관적으로 대면하려 하며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으려 하는 행위임을 말해 준다. 어떤사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다만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데서 끝난다면 우리는 굳이 그것을 직관적인 깨달음으로까지 끌고 나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서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예컨대 어떤 등산가가 벼랑을 타기 위해 막 집을 나서는 아침 하필 등산화의 구두끈이 뚝 끊어졌고 이를 불길한 징조로 생각한 그가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다고 하자. 이때 구두끈이 끊어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경우 오래되어 삭은 구두끈이 평소보다 한 켤레 더 겹쳐 신은 양말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일어난 것이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이는 관찰을 통해 이성으로 구두끈의 객관적인 의미를 '이해'한 데서 오는 진실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이해는 과학적 관점에서 의문의 여지 없이 옳다. 그러나 그 옳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는 과학적 판단이나 이해에는 관심이 없고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직곽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점, 그리고 만일 위와 같은 진실(삭은 구두 끈과 겹쳐 신은 양말의 압력)의 발견을 시라고 한다면 과학과 시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점 때문이다.

위의 사태에는 과학적 관찰과 이성적 판단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는다. 그 등산가가 왜 구두끈이 끊어진 일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느냐 하는 점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볼 때 구두끈이 끊어진 것은 끈이 삭고 또 평소보다 두꺼운 양말을 신은 탓이므로 그가 새 줄로 갈아 매거나 새 등산화로 바꿔 신으면 등산에 아무 지장이 없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로 해석하여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학적 관찰이나 해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이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구두끈이 끊어진 사태에는 과학적 진실만이 아니라 그 과학적 진실과는 어떤 다른 진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후자의 진싱은 논리적인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진실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시적 진실이라 부른다. 그래도 여전히 시적 진실과 같이 모순을 내포한 직관적인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일컫는 바 '진리'란 기준을 과학에 둔 '진리'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이 아닌 이와 같은 '어떤 다른 진실' 즉 시적 진실을 여전히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그 역시 과학 못지 않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앞서의 예에서도 등산가는 과학이 아닌 '어떤 다른 진실'로 인해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한 인간 혹은 전체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가령 황야에서 벼락을 만난 한 악한이 그 공포의 체험으로 인해 선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이때의 벼락은 단지 대기중의 전류방전이라는 과학적 진실 이상의 보다 더 중요한 인생론적 진실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시가 될 수 있는 '어떤 다른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진실'이 아님이 아니라 과학적 진실과 그 종류에 있어서 다를 뿐 그 역시 인생에 중요한 진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과학에 기준을 둔 과학적 진리 외에 시에 기준을 둔 비과학적 진리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결국 이 세계에는 이성의 작용으로 이해되는 논리적, 합리적, 객관적 진리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직관으로 깨닫는 모순되고 비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 이 후자는 모순을 본질로 하고 있는 까닭에 '관찰'로는 발견하기 어렵고 오직 '통찰'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진리이다. 시 창작의 과정에서 통찰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의 예에서도 등산가가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던 것은 이성의 판단에 따른 분석적 사고의 결과에서 얻어진 판단이 아니라 직관적인 어떤 깨달음, 즉 통찰의 결과에서 기인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누구나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계 혹은 사물이 지닌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비과학적 진실, 즉 모순되고 불합리하지만 총체적이면서 인생론적인 진실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에피소드를 시로 쓰고자 할 때 "등산화의 끈이 끊긴 것은 삭은 끈에 가해진 두꺼운 양말의 압력 때문이었다'라고 쓴다면 시가 될 수 없지만 '등산화의 끈긴 것은 벼랑에서의 추락을 예고한 것이다"라고 쓴다면 최소한 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시 창작이나 시 독서에서 통찰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정신활동은 상상력이다.

시인은 우선 세계 혹은 대상을 통찰로써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이 대상이나 세계를 통찰하여 깨우친 진실은 비록 날카롭고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철학적 단상이나 추상적 사고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음 단계로 그것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켜 하나의 형태 혹은 감각적인지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자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이란 통찰에서 얻어진 시적 진실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순수한 사고는 필요하다. 그러나 상상력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상력은 간단히 논리를 초월한 사고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극적으로 모순의 사고에 다다르기도 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즉 단순한 사고와 구분된다. 가령 "꽃밭에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사고를 표현한것이다. 그러나 "꽃밭에는 장미 한 그루가 등불을 밝히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력의 표현이다. 이때 '장미꽃'은 '등불'로 환치되고 있는 이는 사실에 근거를 둔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된 자가 처음 된다" 혹은 "나는 님을 보냈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경지의 '모순의 사고'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훌륭한 상상력은 모순의 사고 속에 어떤 심오한 진리를 지닌 것이다.

상상력은 또한 유추, 연상, 환상 등과 구분된다.

유추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총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대응될 때 이루어지는 사유체계이다. 예컨대 카메라와 인간의 눈은 유추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정체가 렌즈에, 각막이 조리개에, 눈거풀이 뚜껑에, 망막이 필름에 각각 논리적으로 대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눈을 대배시켜 설명한다면 그는 쉽게 카메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상력은 연상과 부분된다. 연상은 유추처럼 한 사물의 전체가 다른 사물의 전체와 논리적으로 대응 되지는 않지만 어떤 부분이나 특징 특히 기억의 유사성에서 기인하여 건너뛰는 사유체계이다. 가령붉은 색의 깃발을 보자 피를 생각하고 형님을 생각하자 고향의 추억을 생각하는 따위이다. 전체적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붉은 색과 피의 색은 유사하고 피를 흘리는 행위와 전쟁의 살육은 유사하며 어린시절의 형과 자신과는 고향이라는 기억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환상은 백일몽에 가까운 것으로 무책임한 사유를 의미한다. 환상은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이다. 달리 말하여 환상이란 인식의 대상이 없는 주관홀로의 사고 유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의 느낌만이 산만하게 제시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상상력은 최소한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과, 유사성을 넘어 직관적으로 대상에 틈입한다는 점에서 연상과 각각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전체와 대응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유추와 다르다. 그러나 상상력에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논리가 아닌 감성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환상에서는 이 감성의 논리조차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통찰과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시의 원천에서 길러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의 원천을 계발하는 수고를 멀리하고 통찰과 상상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마치 사료를 먹이지 않은 소에서 젖을 짜려는 행위에 다름이 없다.

③, ②의 단계를 성공리에 마친 시인은 이미 그 사고 속에 한 편의 시가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언어화하여 원고에 기술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시적 형상화의 단계라 부르는 것에서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단계는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언어의 외면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의 내면적 측면이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볼 경우 시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운율을 가져야 한다. 현대시는 그 이전과 달리 외형적인 율격이 없는 소위 자유시형으로 쓰여져서 언뜻 운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시도 비록 어떤 법칙으로 정해진 소위 정형률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미묘한 내재율을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재율이란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시인의 언어적인 감수성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우리로서는 다만 그와 같은 언어의 음악적 감수성을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난 시인이라면 더 바랄 바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시인의 경우는 후천적으로 이를 꾸준히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연마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은 시들을 가능한 많이 읽고, 가능한 많이 낭독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래도 터득이 안 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므로 시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언어의 내면적인 측면은 보다 복잡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 좁은 지면에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기술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상 '시론'이라는 이름의 저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 원리적인 것만을 간단히 지적한다면 시의 언어화에 필수적인 것은 이미지, 은유, 상징,신화 등에 의한 표현과 아이러니나 역설의 구조라는 점이다. 명백히 말할 수 있거니와 이상의 언어화를 표현되지 않은 어떤 진술도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산문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인 데 우리는 산문과 구분되지 않은 진술을 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 언어의 내면적인 특징이 이처럼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아이러니, 역설로 되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과학적 진리와 다른 시적 진리란 일상적 의미의 논리를 벗어나 그 자체가 모순되거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산문처럼 논리적이거나 직설적인 어법으로는 그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아이러니, 역설 등은 비과학적 진실 그러니까 시적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어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인은 항상 참신하고 의미 있고 창조적인 이미지나 은유 혹은 상징, 신화 등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능력의 계발 역시 많은 독서와 체험과 사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한 편의 졸시를 인용해 보겠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가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① 위 시의 원천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실제 시작과는 구체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의식을 못하고 있지만 과거의 나의 독서나 체험이나 사색이 내 의식의 밑바닥에 이 시를 쓸 수 있는 어떤 침전물들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② 시 의식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신활동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통찰과 상상력이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물론 내 자신의 독창적인 것도 아니요 새롭고 참신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각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문학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학작품은 무슨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사상이나 철학을 독자들에게 감동시켜 그로 하여금 생의 가치 있는 질적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언어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자기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이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능금을 먹다가 깨달았던 데 있다. 왜냐하면 이 평범하면서도 상식적인 진리는 능금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관념적인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구체성을 띠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관념적인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지 철학적 단상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사보의 기사에서 돌아가신 우장춘 박사가 사각형의 수박을 개발했다는 글을 읽고 무언가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였는데 마침 그때 딸 아이가 쟁반에 능금 몇 개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둥근 쟁반에 담긴 그 둥근 능금들을 보자 나는 문득 왜 열매들은 둥근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로 둥글다는 것은 곧 원이며 불교에 서는 자비의 상징이라는 것과 열매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아낌없이 바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통찰이었다. 한 개의 능금 과실로부터 모든 열매는 둥글고 또 모든 둥근 것이니라 ㅡ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능금이 지닌 이 같은 진실 즉 자기희생이 사랑이라는 진실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능금 나무가 지닌 과학적 진실은 "능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의 작은 교목, 잎은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임, 4~5월에 흰 꽃이 방사형으로 피고 거의 구형의 이과는 7~8월에 홍색 또는 황갈색으로 익음 "(이희승, 『국어사전』)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을 보다 발전시키고 완전한 형태의 구체성으로 체계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이 상상력의 작용이다. 그리하여 우선 나는 열매와 대립되는 사물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원에 대립되는 기하학적 모형은 직선이라는 것, 직선은 원과 달리 둥글지 않고 날카로운 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자각에 이렀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다른 한편, 원의 상징이 열매라면 직선의 상징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으로 발전하여 갔다. 물론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전 안테나 따위의 사물들도 직선의 상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재인 능금의 전체 의미망으로서는 적합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전의 안테나는 인식 대상인 능금과 아무 관련 없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식 대상으로서 능금과 관련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드디어 나뭇가지와 뿌리, 가시라는 직선의 상징들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뿌리와 가지는 안테나나 젓가락, 쇠창살 등과 달리 능금 열매가 거느리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무책임한 사고인 환상과 달리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열매 : 가지(뿌리), 원: 직선의 대립된 상상체계가 성립하자 그것은 곧 이차적인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열매에서 연유 하여 먹히는 자와 먹는 자가 지닌 대립 체계이다. 그리하여 전체 상상력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원 : 둥근 것, 열매, 먹히는 자, 부드러운 살, 스스로의 소멸 (헌신)=사랑 직선 : 모난 것, 가지(가시 ·뿌리), 먹는 자, 이빨, 타자에 대한 공격 (수탈)=증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이 대응되는 상상의 체계를 어떻게 종합시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소재적 측면과 상상력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전자의 경우이 모든 소재의 동원은 결국 과실나무와 그 과실을 먹는 행위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후자의 경우는 시인의 또다른통찰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누구에겐가 먹혀진 과실만 그 씨앗의 파종으로 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진실의 발견이다. 이와 같은 역설적 인식을 통해 나는 사랑의 승리, 부드러운 것의 승리라는 도가적 인생관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③ 인용시의 형상화 단계는 앞에서 지적했던 원리 그대로 모든 시적진술이 이미저리, 은유, 상징, 신화 등으로 표현되고 역설 및 아이러니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설명된다. 즉, 가시나무, 탱자, 땅, 하늘,이빨, 뿌리, 능금 등은 기본적으로 모두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은유, 상징의 언어이다. 그리고 과실이 땅에 떨어져야만 새싹을 움틔운다는 인식은 신약성서의 '포도나무' 비유에 조응된다는 점에서'신화'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으로 '열매란 누구에겐가 먹혀야만 새생명을 얻는다는 인식'은 바로 그 자체가 역설 혹은 아이러니로서의 진실이다. 시의 상상력의 전개 역시 이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출처 : 유진& 선린대학 문예창작과정
글쓴이 : 유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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