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밟히는 풀이 있다 본문
밟히는 풀이 있다
김종호
풀밭을 걸을 때마다 두렵고 죄스럽다
쓰러졌다 무겁게 일어서는 풀
끝끝내 일서서지 못하는 풀
키 큰 풀들은 키가 큰 대로
키 작은 풀들은 키가 작은대로
온몸을 눕혀 길을 내준다
그리움을 향해 솟아오르던
그들의 여윈 어깨가 속절없이 무너진다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그들은
가끔 풀빛 장검을 휘두르거나
도깨비바늘 같은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으로
사소한 반발을 시도할 때도 있지만
풀밭에 가면 언제나 밟히는 풀들이 있다
우두둑 힘없이 뼈를 눕히는 풀들이 있다
분노와 서글픔이 흐르고 흘러
발목을 적시는 풀밭에 가면
나는 스스로 서러워 쑥부쟁이, 물달개비, 노루오줌꽃
그들 곁에 말없이 앉았다 온다
눈물겨운 그들의 작은 씨앗 몇 알
내 힘없는 가슴에 품고
그들의 뿌리가 살아있음이 다행이라고
그래도 일어서는 풀이 있다고
애써 죄를 감추어 보지만
또다시 죄 없는 풀들을 밟으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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