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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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전라도여, 전라도여/강인한

오선민 2010. 5. 13. 07:38


   전라도여, 전라도여

          -- 강 인 한


   Ⅰ

거덜이 난 고향,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유창한 서울말을 구사하러
친구는 서울로 가버렸지.
컬컬한 막걸리를 버리고
드는 낫을 버리고 친구는
도시로 나가 운전을 배우고 맥주도 홀짝이고
그리고는 택시 운전수가 되었지.
월남에 가서 아슬아슬한 목숨을 달랑이며
친구는 딸라에 맛을 들이곤
변해버렸지.

거덜이 난 고향,
사우디 아라비아로 더러는 아주아주 멀리
서독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버리고
전라도는 누가 지키나.
차마 못 버리는 에미 애비의 땅에 서서
한 그릇 찬밥 덩이 앞에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굴을 배우고
양심 같은 맹물을 마시며
불러볼 노래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네.
전라도여, 전라도여.


   Ⅱ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흐르는 곳
백년을 질척이는 갯땅이여, 오 갯땅이여.
황산벌에서 찢어진 마지막 깃발이여.
무너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에서
나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구나.
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를 보며
황해로 지는 해를 보며
오월에 나는 무너지고 싶구나.

할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신새벽에 빌었지.
구리 궤짝 속에 엽전 꾸러미 시퍼렇게 녹이 슬도록
빌고 빌었지.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갈재 갓바우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르고
휘황히 빛나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어
할머니는 귀머거리가 되었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
할머니는 이냥도 귀머거리.
새야 새야
울지 마라.


   Ⅲ

아버지가 끄을려 가고 있었지.
먼 데 개짖는 소리 속으로
그 어둠 속으로 아버지는 끄을려 가고 있었지.
우리사 아무 죄도 없응게,
걱정 마라, 후딱 오마.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었지.

총소리, 폭격 소리에
돌담 위의 호박 잎새 숨 죽이는 여름날
강변엔 뙤약볕만 먹고 자란 뱀딸기
핏빛으로 핏빛으로 익고 있었지.

전라도여, 전라도여.
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까칠한 턱수염
내 뺨을 비비고 부르르 떨리더니
먼 데서 개짖는 소리 들리더니
귀신들 도깨비들, 수지니 날찌니
해동청 보라매 훠이훠이 다 날아가버리고
개짖는 소리 데불고
밤 늦은 길을 이제는 내가 돌아가네.
시들은 바람 속을 내가 돌아가네.


   Ⅳ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흥얼거림
저 바람 속에 들리는 것을.
설움빛까지 드러난 황토흙에 부리를 씻고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열 굽이 스무 굽이
바람도 목이 쉬고
검게 탄 바윗돌이 울먹이는 산마루
철쭉꽃 같은 철쭉꽃 같은
봉화가 오른다.
한 무더기 철쭉꽃이 타오른다.
북소리, 고함 소리
관솔불 높이 이글거리는 밤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녹두꽃 흐드기는
샛바람을 따라 새털구름을 따라
짚신발로 뛰어가던 황토길
할아버지 죽창 들고 거꾸러진 벌판,
나이 어린 빨치산이 부르튼 발을 안고
숨 거둔 골짜기,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Ⅴ

산 적적, 흰 그리메
불 같은 그리움을 다스려
칡넌출 벋어간 곳,
전주에서 솜리까지 밤길 칠십리
칼날선 내무서원 눈길을 피해
달아나온 아버지의 맨발
삼베 잠뱅이, 거뭇한 수염 그리워.
지금은 비어 있는 마을
젊은 놈들은 도시로 가고
잘난 놈들은 돈벌러 가고
약은 놈들은 등을 치러 가고
쑥떡만 남아서 지키는 고향.
웃으면 눈이 이쁜 가시내들
과자 공장으로 다방으로 술집으로
더러는 밑천도 팔러 다 떠나가버리고
비어 있는 마을에 햇살은 고와
어어이 부르면
어어이 뒷소리로 넘기던 모내기는 누가 하나.
전라도여, 전라도여.

만세 만세, 만세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던 할머니의 삼월도 가고
사월도 가고
슬픈 오월 하늘.


   Ⅵ

발치에 섬진, 영산강을 두고
제 설움에 돌아눕는 만경, 금강을 다둑이고
크막하게 갈재가 뻗쳐
솟은 재를 넘는 옛날도 옛날
소금 장수 시드러진 가락에
무더기 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산도둑놈 거친 숨소리에
소쩍 소쩍 새도 울어라.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여.

이 나라의 가장 후진 백성들의 한숨이
모여서 삭는 곳
오월도 질척이는 갯땅, 오 갯땅이여.
한 그릇 찬밥 덩이 앞에들 놓고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꿀꺽꿀꺽 돌려 마시는 한 사발의 찬물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여,



-- 강인한 시집, 『전라도 시인』에서, 1982, 태멘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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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서봉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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