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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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홍해리 시집 ‘비밀’과 풍란

오선민 2010. 6. 7. 09:24

  

홍해리 선생님이 새 시집 ‘비밀’을 보내왔다.

현재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 우리詩, 우이시낭송회,

도서출판 움>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2년 전에도 몇 번째

시집인지도 모를 ‘황금 감옥’과 ‘비타민 詩’를 내었는데,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시집에는 전에도 쓴 일이 있는 시인의 말

‘명창정궤의 시를 위하여’와 함께

여든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 중에 맘에 드는 시 8편을 골라 풍란과 같이 올린다.

건강에 유의하셔서 좋은 시를 많이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집과 함께 동덕여고 개교100주년 기념 교지

‘同德’ 제37호를 보내왔다. 축시 ‘목화꽃 사랑’을 쓰면서

보잘 것 없는 나의 눈꽃 사진을 삽화로 깔았다.

감사드린다.



 

♧ 시인의 말 - 명창정궤明窓淨?의 시를 위하여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이제까지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시 쓰는 일은 육체가 행하는 것처럼 영혼이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이다

어떤 곡해나 구속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나 주의도 필요없다

시 쓰기는 영혼의 자유 선언이다

시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늘 설레면서 한편으로는 한 편 한 편으로 완성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은 잘 갖춰진 과일전과 같다

시는 호미나 괭이 또는 삽으로 파낸 것도 있고 굴삭기를 동원한 것도 있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무 살 냄새가 향긋하다

나무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온다

목이 잘리고 팔이 다 잘려나가고 내장까지 분해되어도

도끼나 톱을 원망하지 않는 나무는 죽어서도 성자다

한자리에 서서 필요한 만큼만 얻으며

한평생을 보낸 성자의 피가 죽어서도 향그러운 것은

나일 먹어도 어린이 같은 나무의 마음 탓이다

사람도 어린이는 향기로우나 나일 먹으면 내가 난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한 그루 나무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이하 생략, 나머지는 앞 ‘홍해리 선생의 시론과 섬잔대’ 참조)



 

♧ 계영배戒盈杯 - 홍해리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 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 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잔,

깊고 따뜻한 너



 

♧ 비밀 - 홍해리


그 여자 귀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문제다

조심하라 네 입을 조심하라

그녀의 입은 가볍고 싸다

무겁고 비싼 네 입도 별수 없지만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깝다고

입이 근지럽다고

허투루 발설 마라

말끝에 말이 난다

네 말 한 마리가 만의 말을 끌고 날아간다

말이란 다산성이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 여자 귀엔 천 마리 파발마가 달리고 있다

말은 발이 없어 빨리 달린다, 아니, 난다

그러니 남의 말은 함부로덤부로 타지 마라

말발굽에 밟히면 그냥 가는 수 있다

그 여자 귓속에는 세상의 귀가 다 들어 있다

그 여자 귀는 천 개의 나발이다

그녀는 늘 나발을 불며 날아다닌다

한번, 그녀의 귀에 들어가 보라

새끼 낳은 늙은 암퇘지 걸근거리듯

그녀는 비밀肥蜜을 먹고 비밀秘密을 까는 촉새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 자벌레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 한 끼 식사 - 홍해리


겨우내 이 나무 저 나무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직박구리 한 쌍

매화꽃 피었다고 냉큼 찾아왔다


여름도 한겨울이던 50년대

물로 배를 채우던 시절

꿀꿀이죽은 꿀꿀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맛이야 꿀맛이 아니었던가


가지마다 사푼사푼 옮겨 앉아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쪽쪽! 빨고 있다

참 아름다운, 황홀한 식사다


놀란 꽃송이들 속치마까지 홀홀

벗어 던지니

이른 봄날 마른하늘에 눈 내린다

금세 매화나무 배불러오겠다.



 

♧ 꽃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 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 벌금자리


벼룩자리 벼룩은 어디로 튀고

어쩌다 벌금자리가 되었을까

청보리 한창 익어갈 때면 이랑마다

그녀가 머리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살보시하려 달뜬 가슴을 살포시 풀어헤쳐

천지간에 단내가 폴폴 나는 것이었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

다디단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옆집 달래까지 덩달아 달떠 달싹달싹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옆찔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

겨우 눈에 뜨이는 벌금자리

해말간 열일곱의 애첩 같은 그녀

흐벅진 허벅지는 아니라 해도

잦은 투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밤

얼마나 뒤척이며 흐느꼈는지

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서

사는 일이 낭떠러지, 벼랑이라고

벌금벌금 벌금을 내면서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녀는 작은 등롱에 노란 꽃밥을 들고 있었지만

한낮이면 뜨거운 볕으로 콩을 볶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길에 대하여 


한평생을 길에서 살았다

발바닥에 길이 들었다

가는 길은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공간에서 제자리를 가고

시간에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샛길로 오솔길로 가다

큰길로 한번 나가 보면

이내 뒷길로 골목길로 몰릴 뿐

삶이란 물길이고 불길이었다

허방 천지 끝없는 밤길이었다

살길이 어디인가

갈 길이 없는 세상

길을 잃고 헤매기 몇 번이었던가

꽃길에 바람 불어 꽃잎 다 날리고

도끼 자루는 삭아내렸다

남들은 외길로 지름길로 달려가는데

바람 부는 갈림길에 서 있곤 했다

눈길에 넘어져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빗길에 미끄러져도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어쩌다 마주쳐도

길길이 날뛰는 시간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 했지만

끝내 비단길, 하늘길은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 꿈길의 시퍼런 독약이었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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