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물푸레나무]詩모음/ 황금찬, 이향아, 김명인, 이상국, 안도현, 박정원, 박형권, 김태정, 김참 본문
옛날과 물푸레나무
황금찬
이제는 옛날, 그보다도 먼 내 어린시절 누리동 하늘 숲속에 외딴 초막이 내가 살던 옛집이다. 그 집 굴뚝머리에 몇십년이나, 아니 한 백년 자랐을까 큰 물푸레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불며, 비가 올 때면 나뭇잎 쓸리는 소리와 비 듣는 가락이 흡사 거문고 소리 같아서 우리는 그 나무를 풍악나무라고 했다. 늦여름이나 장마철이 되면 낮은 구름이 자주 그 나무 위에 내려앉곤 했다. 물푸레나무는 덕이 많고 그래 어진 나무다. 어린이 새끼손가락 보다도 가는 물푸레나무는 훈장 고선생님의 손에 들려 사랑의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 농기구의 자루가 되어 풍년을 짓기도 했다. '화열이'가 호랑이 잡을 때 쓴 서릿발 같은 창자루도 물푸레나무였고 어머님이 땀으로 끌던 발구도 역시 그 나무였다. 물푸레나무 굳센듯 휘어지고 휘어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서는 어느 충신과 효도의 정신이며 성현의 사랑이다 나에게 이 물푸레나무의 이름을 다시 지으라고 한다면 나는 성현목이라고 이름하리라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이향아
여러 가지가 함께 좋을 때
그러나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할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꼭 하나만 골라야 하므로 무수한 것을 외면해야 할 때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므로 어중간한 자리에서 길을 잃을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하나의 길을 걸어서 인생을 시작하는 일
한 사람과 눈을 맞춰 살아가는 일
그리하여 세상이 허망하게 달라지는 일
눈 감고 벼랑에 서는 일 두려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여럿 가운데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여야 하는 때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길고 낯선 이름
더듬거리는 나를 웃으려는가
잘라낼 수 없는
몰아낼 수 없는
돌아서 등질 수 없는 아픔을
지조 없다 하려는가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나 끝끝내 너 하나를 버리지 않아
이제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다
그 물푸레나무 곁으로
김명인
그 나무가 거기 있었다
숱한 매미들이 겉옷을 걸어두고
물관부를 따라가 우듬지 개울에서 멱을 감는지
한여름 내내 그 나무에서는
물긷는 소리가 너무 환했다
물푸레나무 그늘 쪽으로 누군가 걸어간다
한낮을 내려놓고 저녁 나무가
어스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머리를 빗질하려고 문밖으로 나와 앉은
그윽한 바람의 여자와 나는 본다
밤의 거울을 꺼내들면
비취를 퍼 올리는 별 몇 개의 약속,
못 지킨 세월 너무 아득했지만
내 몸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 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도 얼비치던 그 여자의 푸른 모습,
나무가 거기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
나무를 걸어놓았던
흔적이 있던 그 자리에
나무 허공이 떠다닌다, 나는
아파트를 짓느라고 산 한 채가 온통 절개된
개활지 저 너머로 본다
유난한 거울이 거기 드리웠다
금세 흐리면서 지워진다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저 물푸레나무 어린 새순도
안도현
저 어린 것이
이 험한 곳에 겁도 없이
뾰족, 뾰족 연초록 새순을 내밀고 나오는 것
애쓴다, 참 애쓴다는 생각이 든다
저 쬐그만 것이 이빨도 나지 않은 것이
눈에 파랗게 불 한번 켜 보려고
세상 속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을 내밀어 보는 것
저 물푸레나무 어린 새순도
이 봄에 연애 한번 하러 나오는가 싶다
물푸레나무 바라보는 동안
온몸이 아흐 가려워지는
나도, 살맛 나는 물푸레나무 되고 싶다
저 습진 땅에서
이내 몸 구석구석까지 봄이 오는구나
물푸레나무
박정원
사랑이여
그대가 물푸레나무인 줄 몰랐다
물푸레― 라고 숨죽여 읊조리면
그대 우러르는 먼 산이
시 한편 들려주고
돌아보는 뒷모습이
그림 한 장 남겨줬다
물푸레나무 아래서
이 나무가 무슨 나무냐고 물었듯이
사랑이여
나는 그대가 사랑인 줄 몰랐다
웃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치어다볼 때마다
정강뼈 아래 물빛을 온통
물푸레로 물들이던
사랑이여
물푸레 옆에서 물푸레를 몰랐다
점점 내가 물푸레로 번져가는 것을 몰랐다
물푸레 물푸레 되뇌기만 하면서
맑은 물 한 종지 건네는 그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푸레나무
박형권
저 나무, 물푸레나무
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
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방 한 칸 내고
엽서만한 창문을 내고
녹차 물을 끓이면
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
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밤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귀를 댄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
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
끙 끙 끙
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
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
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제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물푸레나무숲
김참
물푸레나무숲에서 부엉이가 운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는 녹색 꽃 피운 난초들이 가득하다. 부엉이 앉아 있는 물푸레나무 아래 오래된 돌무덤이 있다. 이 돌무덤에 누가 잠들어 있더라? 물푸레나무 그늘 드리워진 무덤 옆에 누워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 침침한 방문을 열고 끊어진 기억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해가 떨어지고 달이 뜨고 별들이 총총 돋아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덤 속에 잠든 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둠 속으로 유성 하나 지나간다. 은하철도의 끊어진 철로를 따라 우주 저편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간다.
* 사진출처 : daum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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