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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0)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48

ㅇ 젊은 시인들의 감각이 즉물적이고 찰나적인 어떤 것으로 폄하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추상적으로 말하면 감각은 '기술'이 아니라 '실존'이지요. 이성적 사유로 흡수되지 않는 감각적 실존의 영역을 온전하게 되살려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원이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시는 없지요. 다만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기억의 힘으로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면, 감각의 힘으로 현재의 나를 이리저리 쪼개고 맞춰보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아름다운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를 몰라서 엉뚱한 시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이를테면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요. 마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처럼, 시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점차 제거해 나가서 오로지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려는 시도 같은 것이랄까요. 그러다보면 궁극적으로 '언어'와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술사를 돌이켜볼 때 장르에 대한 자의식은 궁극적으로 그 장르 특유의 '매체'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예컨데 영화가 궁극적으로 영상의 운동이고, 그림이 궁극적으로 색과 빛의 운동이라면, 시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운동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는데, 야금술로서의 시가 있고 연금술로서의 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만이 순수하다. 그것만이 시의 본질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 이렇게 가건 저렇게 가건 시적인 것에만 도달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의 윤리라고 하면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지향하고, 현실을 반영하고, 공적인 발언을 하는 것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저는 이런 기준들이 좀 답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뭔가 이미 정답을 전제로 한 발언들처럼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미 현실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소통의 방법도 자명한데 왜 그것에 대해 발언하고 소통하지 않는가, 하는 강압이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요컨데 관계, 소통, 발언 등에 대해서, 저는 좀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시의 윤리가 아닌가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윤리는 윤리와 비윤리의 틈을 파고 들어가서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을 열어젖히는 데에 있는 것이지 공동체가 일반적으로 '윤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재생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 겁니다.

- 신형철 / 200, 올해의 시를 말한다, 대담 중에서 / <현대시>2007. 12월호


ㅇ 사실 지금 시대에 내용이나 의미에 대한 폭넓은 회의와 지겨움이 대세가 되고 있지만, 내용이나 의미도 선험적 이성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어요. 시인들에게 과거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고 지금의 '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과거도 변화됩니다. 시인이 자신의 과거를 지금에서 살아내지 못한다면 미래로 나가는 감각을 갖지 못합니다. 감각은 기억 자체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자신을 재구성한 어느 순간에 솟아난 어떤 구멍이나 절락 같은 것이지요.


- 박형중 / 200, 올해의 시를 말한다, 대담 중에서 / <현대시>2007. 12월호



ㅇ 소재를 반복, 변주하는 작업은 일종의 자기복제로 흐를 위험성이 높은 데도 불구하고 시인(특정 시인을 지칭)은 해태, 염소, 오리, 눈사람, 오리나무 등등의 소재들을 되풀이해 불러낸다. 반복과 변주는 염결성과 편애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집중과 성찰, 그리고 되풀이를 통한 자기 확인의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어놓은 자기 집을 들여다보고, 다시 그 집의 틀을 깨고 새로운 집을 짓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반복과 변주를 낳고, 이 지리한 싸움이 (미학주의와 허무주의)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세계를 구촉해나가는 것이다.

이홍섭 / 시로 여는 세상 , 2007. 겨울호



ㅇ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조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가지 계속 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침대갖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푸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사람을 사랑 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ㅇ 回文(회문,palindrome)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문장을 말한다.

우리말 회문으로 "다시 합창합시다"와 "소주 만 병만 주소" 외에도 "아들 딸이 다 컸다 이 딸들아",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여보게 저기 저게 보여" 등이 있다.

★ 다음은 回文詩다.

美 人 怨(回文) 李 奎 報

腸斷啼鶯春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 타는데
落花紅簇地 꽃은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香衾曉枕孤 이불 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하여
玉검雙流淚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郞信薄如雲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 같고
妾情撓似水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누나
長日度與誰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皺却愁眉翠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順讀)

*[撓]어지러울 뇨,돌 효. [皺]주름 추. [却]물리칠 각. [검](儉자에서 人변를 빼고 月변을 넣음) 뺨.

美 人 怨(역순으로 했을경우,,,)

翠眉愁却皺 푸른 눈썹은 수심 겨워 찌푸려 있는데
誰與度日長 뉘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어 볼까
水似撓情妾 강물은 내 마음인 양 출렁거리고
雲如薄信郎 구름은 신의 없는 님의 마음 같아라
淚流雙검玉 두 뺨에 옥 같은 눈물 흐르고
孤枕曉衾香 외론 베개 새벽 이불만 향기롭구나
地簇紅花落 땅 가득히 붉은 꽃이 떨어지고
春鶯啼斷腸 봄 꾀꼬리 우는 소리에 애간장 타누나(逆讀)

이 시는 고려왕조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이규보가 지은 회문시(回文詩)이다. 회문시란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읽어도(順讀) 뜻이 통하고, 제일 끝 글자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자까지 읽어도(逆讀) 뜻이 통하는 시를 말한다. 뜻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운자도 맞아야 한다. 일종의 배체시(俳體詩)이자 유희시(遊戱詩)이다. 회문시는 시인들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추구하고자 고심에 찬 노력 끝에 창조된 쟝르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절묘하게 살려서 짓는 회문시는 한 수에 두 수의 뜻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아주 경제적인 시이기도 하다.

* 우리말 회문의 예다.

다들 잠들다,

통술집 술통,

아 좋다 좋아,

다시 합창 합시다,

소주 만 병만 주소,

색갈은 짙은 갈색,

다 같은 것은 같다,

바로크는 크로바,

다 이뿐이뿐이다,

여보 안경 안보여,

자 빨리 빨리 빨자,

짐 사이에 이사짐,

홀아비집 옆집 비아홀,

나가다 오나 나오다 가나,

다리 그리고 저고리 그리다,

소 있고 지게지고 있소,

다시 올 이월이 윤이월이올시다,

다 가져가다, 건조한 조건,

기특한 특기,

다 이심전심이다,

자꾸만 꿈만 꾸자,

다 같은 금은 같다,

다 좋은 것은 좋다,

생선 사가는 가사선생,

여보게 저기 저게 보여,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대한 총기공사 공기총 한 대,

아들 딸이 다 컸다 이 딸들아,

지방상인 정부미 부정인상 방지,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딸들아 집장사 다 하련가, 등등....



ㅇ 그(하이데커)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자기 이론을 예증하기 위하여 다룬 예술작품은 1) 고흐의 한 켤레 구두(그는 농부의 구두라 믿었지만 사실은 고흐가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구두다.) 와 2) C.F 마이어의 시 '로마의 우물' 그리고 3) 희랍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3가지다. 이 가운데서 고흐의 '한 켤레 구두'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가 시집 없는 시인임을 말해준다. 그 대의는 다음과 같다. 그가 사물과 예술과 예술작품의 차이를 살피는 대목에서 나오는 범상치 않은 문장이다.

구두라는 도구의 벌어진 어두운 안쪽 구멍에는 노동의 걸음걸이의 쓰라림이 바로 서 있다. 구두라는 도구의 질기고도 야무진 무게 안에는 사나운 바람이 달리는 들녁 아득히 뻗쳐 있는 가지런한 밭이랑을 끊임없이 더듬는 느린 발걸음의 끈질김이 쌓여 있다. 가죽에는 흙의 습기와 진함이 배어 있다. 구두 밑바닥에는 해거름을 해치며 굽이치는 들길의 쓸쓸함이 묻어 있다. 신이라는 도구 안에서 출렁이고 있는 것은 대지의 묵묵한 부름이고, 보리의 무르익음을 고요히 선사하는 일이고, 황량한 겨울밭 휴경지에서 대지가 남몰래 자기를 거절하는 일이다. 이 도구를 꿰뚫고 있는 것은 식량확보를 위한 말하지 않은 걱정이고, 다시 어려움을 이겨낸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고, 출산이 다가운 때의 떨림이고, 죽음의 위험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도구는 대지에 귀속하고, 農婦의 세계 안에서 지켜지고 있다. 도구 그 자신은 이 지켜진 귀속에서 일어서고 그 자신 안에서 쉬게 된다.

고흐의 '한 켤레 구두' 에 대한 하이데커의 철학적 명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낡은 구두가 숨기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 허만하 / 현대시학 2007년 10월호



ㅇ 다수의 독자를 예상하고 일정한 이야기를 펼치는 소설이 장르의 속성상 대중적 소통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데 비해, 자전적 독백의 양식인 시는 시인 자신의 고민을 비교적 자유롭게 토로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인 문제보다 훨씬 추상적 차원에 놓이는 생의 문제를 사유의 주제로 내세울 수 있다. 문제는 그 추상적 사유의 궤적이 시의 형식적 요건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한 편의 작품으로 안착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의 형식적 기율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젊은 시인들은 자신의 내적 사유를 일방적으로 독백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소통을 고려하지 않거나 예술적 형식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시가 오래도록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젊은 시인들은 진지한 주제의식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선배 시인들의 창작 방법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 이승원 /<문학 선> 2007년 가을호



ㅇ 시를 쓰면서 고려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시적 정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예컨데 시란 쉬운 언어로 감동을 주어햐 한다든지, 오랜 퇴고의 과정을 거친 뒤 발표해야 한다든지 하는 대체로 편향적인 정의로부터 떠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는 일이다.
시정신은 시를 바르고 굳건하게 그리고 당당한 것으로 이끈다. 마치 지조 있는 글처럼 시는 자신과 일치해야만 하는 동시에 정신의 위용을 함께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의 마음가짐은 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우리시에서 부족한 것도 바로 시정신, 곧 철학의 부재이다. 시가 철학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일상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가 미와 균형감을 이루며 현대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수사보다는 주제의식, 단순성보다는 입체성을 띨 때 시는 보다 새로울 것이라는 것이 오랜 생각이다.

- 박주택 / <시와시학>2007년 가을호



ㅇ 근대시사에서 서정성을 고수해온 서정시들이 에코이즘(ecoism)에 속한다면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아방가르트,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실험적인 경향은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에고이즘(egoism)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시, 비시, 해체시, 혹은 최근에 미래파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경향들은 바로 실험을 앞세운 에고이즘적 경향이다.
에고(서정)진영이 자아와 세계의 유기적 연대라는 윤리에 기초해 있다면, 에고(실험)는 자아와 세계의 연대를 파괴하면서 윤리가 아닌 순수하게 미학적인 것을 추구한다. 전자는 윤리에 매달리면서 쉽게 미학적인 타성에 젖어들 수 있으며, 후자는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면서 나르시즘적인 자아도취의 미학에 빠져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ㅇ 자아를 구속하는 체계, 통합된 주체, 자아와 세계의 윤리적 연대 등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미학적인 새로움을 향해 내달려온 실험 진영의 시들은 우리 시가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리하여 우리 시의 언어와 상상력의 쇄신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우리 시의 미학을 갱신해왔다. 그러한 점에서 실험 진영의 시는 여전히 의미 있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의 본질은 아니다. 시가 본질에서 멀어져버리는 순간이 바로 시의 종말이다.

- 김옥성 /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ㅇ 원래 '몸'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실체이자, 모든 문화가 생성되는 최초의 지점이다. 하지만 그동안 인간의 '몸' 은 '이성(정신)'에 비해 현저하게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범주로 평가되어 왔다. 특히 '몸'은 '미추(美醜)'라는 가치 평가적 개념으로 분기되면서부터 그릇된 사회적 편견을 일정하게 낳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최근 강력하게 대두된 탈 근대적 기획에 의해, 근대가 억압해온 가치론적 범주로 인간의 '몸'은 서서히 부활하게 된다. '몸을 통한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니체)' 에 입각한 이러한 페러다임의 전환은, 아직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통해 간간히 새어나오는 수준이지만, 매우 당당하게 자신만의 인식론적 표지를 그리면서 우리 시의 육체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가장 구체적인 원형적 실체인 '몸'의 재발견을 통해 인간의 '지워진(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려는 동력이 있다.

- 유성호 /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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