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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9)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52

정민 교수가 말하는 좋은 시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첫째,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둘째,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셋째, 시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넷째,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다섯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여섯째,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일곱째,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좋은시이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여덟째,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아홉째,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래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열째, 시 속에서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모호성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의적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열한번째,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그리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마음이 고이는 법 없이 생각과 동시에 내뱉어지는 말, 이런 말속에는 여운이 없다. 들으려고는 않고 쏟아 내기만 하는 말에는 향기가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무언가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열두번째, 시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소중하다.
한 글자가 제대로 놓이면 그 시가 살고, 한 글자가 잘못 놓이면 그 시가 죽는다.
훌륭한 시인은 작은 표현 하나가 가져오는 미묘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 [출처] 정민 교수가 말하는 좋은 시|작성자 김신영



조은숙 : 보니까, 교도소에서 '암태도' 3회 분을 쓰셨드라고요. 그런데 처음 집필 허가가 나지 않았을 때, 광주교도소에서 나무젓가락 사이에 샤프심을 끼워 실로 묶어서 고정한 후, 국어사전에 내용을 썼다고 하던데요.
송기숙 : 응, 집사람이 샤프심을 책갈피 사이에다 넣어서 책을 넣어줬어. 그래서 국어사전 제일 아래 있더라고, 제일 끝에 한 줄 씩 거그다가 '암태도' 초고를 썼어.

- 송기숙, 조은숙 대담 녹취록 중에서 / 조은숙 저 '송기수의 삶과 문학' 324쪽


엘리엇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시피 그는 과거 시인들의 대목을 인용하면서 현대적으로 변용해서 과거와 현대를 대비시키는 인유引喩 활용의 명수였다. 그의 시에 대해 시론 쓴 유럽문학사란 호들감스러운 논평도 나온 터이지만, 지금 그것을 표절이라고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엘리엇의 인용부호 없는 의도적 인용은 그의 효과적인 시적 기법의 하나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표절인가, 고도의 암시성을 노린 인유인가, 하는 것은 대체로 당대 해석공동체의 다수의견에 따라서 판가름나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고 능란한 시인은 훔친다는 말처럼 시적 성취의 높낮이가 대세를 결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명백한 모티프나 세목의 차용 혹은 도용이 의외로 많은 것도 사실일 것이다. 다만 맥락에 따라 동일한 모티프의 효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 유종호 / <현대문학> 2010년 1월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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