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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6)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51



ㅇ서정시는 자기 고백의 장르이다. 자기 혼자의 내성적 목소리는 일차적으로 타자의 존재나 생각, 세계관 등을 거부한다. 시에서 타자의 말이나 사건, 인물의 성격화 등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서사 장르가 등장인물이나 사건 등을 통해 여러 상황을 제시하면서 열린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은 상호 대화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서사의 경우처럼 그런한 대화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화성의 부재는 서정시에서 내성이나 고백과 같은 자아의 문제로만 축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서정시에 자아 이외의 문제가 전연 도외시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포괄하는 보편사의 문제나 타자의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서 서정시는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형상화 방식이 역사의 전망이나 인물의 성격화 같은 서사 특유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 송기한 /<시와 정신> 2009년 가을호


ㅇ 첫째, 최근의 우리 시는 너무 억지가 많고 인위적이고 그런 점에서 머리로 쓴다. 난 이렇게 따지고 분별하고 조작하고 무얼 만드는 게 지겹다. 시인들은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고 축축한 주관성, 주관에 의한 대상 착취를 그만두어야 한다.
둘째 주체중심주의와 관련되지만 시인들이 너무 말들이 많다. 이런 주관적 진술, 설명, 주장, 부연, 넋두리른 대상에 대한 폭력이다. 대상 혹은 사물들은 언어를 모르고 사유를 모른다. 따라서 그저 보여주는 세계는 사유, 이성, 정서, 상상력을 매개로 하지 않는 보기이고 듣기이다. 그러니까 머리를 버리고 바보가 되어야 한다.
셋째, 최근의 우리 시는,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는 문맥도 안 통하고 너무 어렵다. 나도 초기엔 난해시를 썼지만 최소한 문맥은 통하는 시였다. 문맥도 안 통하는 시를 쓰는 건 모험도 아니고 실험도 아니다. 이상의 난해시는 얼마나 투명하고 어법이 정확한가? 그의 '오감도 제1호'는 초등학교 4학년이면 읽을 수 있지만 시적 의미는 얼마나 깊고 한편 문체는 얼마나 가벼운가? 이런 시 쓰기는 최소한 자기 기만이 없고 거짓말을 모르고 무엇보다 머리를 버릴 때 가능할 것이다.

- 이승훈 / 머리도 버려라 / <유심> 2009년 9/10월호


ㅇ '-습니다' 체는 겸양 어법이자 존경 어법이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기 않는다. 거부감은 커녕 공격성의 제거에 따르는 문체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과 안심을 안겨준다.
따라서 ' -습니다' 체는 쓰기에 따라 훌륭한 심리적 효용성을 가져올 수 있다. 조심스럽고 심중하면서도 자신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자리에 놓는 어법,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하는 자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하기 쉽다.

- 정효구 / 고백 혹은 고해성사로서으 시 쓰기/ <유심> 2009년 가을호


ㅇ 하이데커는 1947년에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를 발표하여, 과제는 '본질존재로서의 존재'와 '사실존재로서의 존재' 라는 존재의 구별이 어떤 연유에서 생긴 것인가를 묻는 일이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시원의 단순한 존재' 가까이에 설 수 있다는 소회를 밝힌다.
하이데커가 말하는 본질존재와 사실존재의 구별에 우선하는 '시원의 단순한 존재'(퓨시스 - 자연)는 우리 한국인에게 그렇게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한국어로 '존재'라 했을 때, 우리는 '본질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사실존재'를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의 전통, 또는 형이상학적 사유에서는 '존재'라 하면 자연스럽게 '본질존재'를 말한다.
철학의 영역이 아닌 예술영역에서 '시원적 존재'를 깨닫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던 화가가 바로 세잔이다. 그는 지각 이전의 세계를 가리며 눈앞에 보이는 산의 지질학적 시대까지 거슬러 올랐다. 그가 생빅투아르산의 대리석 감촉을 그리기 위하여 감각 이전의 감각을 동원했던 사실을 그가 되풀이해서 그렸던 일련의 생빅투아르산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세잔의 다음 소신이 사물(사실존재)이 인간의 가시성 뒤에 있는 실재를 계시하는의미에서 아주 인상적이다. 자연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표면적이기 보다도 훨씬 내면적인 것이다'

'내가 그림으로 나타내려 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에 감겨 있다'

' 보다 잘 느끼기 위하여 알 것, 보다 잘 알기 위하여 느낄 것'

세잔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일련의 정물화를 두고 사피로는 다음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정물의 대상)은 식사를 위하여 차려진 것이 아니다. 과일은 잘려지지도, 껍질이 깍여지지도 않았다. 정물이 흩어져 있는 모양새나 상보의 불규칙한 주름은 아직 질서 지어지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 내가 본 과일은 벌써 자연의 일부가 아니며 그렇다고 아직 인간생활의 일부도 아니다. 자연과 쓰임새 사이에 매달려 오직 명상하기 위하여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

ㅇ 하이데커 존재론의 모티브의 하나로서 시원 즉 근원이 있는 것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 허만하 / 야생과 근원의 예술, 중에서(축약) /<현대시학)2009년 9월호



ㅇ - 황병승 '그 여자의 장례식' 부분 / 인용(생략)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새로운 시인의 시이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현실은 없다. 이 시에서 환상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비평가를 포함해서) 많지 않다. 사실 이 시는 '의미적'으로 읽히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환상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상실하고, 현실과 무관한 동화속 이야기처럼 제시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 역시 이 시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환상임을 알고 있으므로, 환상 이외의 다른 의미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오히려 편하게 시를 읽고 별다른 부담없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이때 환상성은 현실의 억압과 부조리를 폭로하는 고유의 전복적인 기능을 상실한다. 환상의 두 가지 측면 - 낯설음과 불편함을 제??하므로써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측면과, 대리만족을 통해 거짓 화해를 부추기는 측면 - 중에서 비판적인 성격인 사라지고, 현실의 고통을 잠시 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성에 기댄 적지 않은 시들이 의외로 뿌리가 빈약해 보이는 것은, 환상이 종종 인위적으로 조작된 테크닉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놀이가 금방 진력이 나듯이, 놀이를 위해 강박적으로 되풀이되는 환상은 지루하고 빤한 것이 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뒤틀린 화법과 자기 분열적 상황의 전시,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기행과 엽기의 상상력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그들의 시는 각각 개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있지만,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보면 엇비슷한 문제의식과 그만그만한 언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정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들의 시는 기교와 모사와 복제에 그치고 말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기교주의를 낳을 것이다.

- 문혜원 /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 시의 특징, 중에서 / <시와 반시>2006년 가을호



ㅇ 오늘날은 시인들이 누구를 위하여 쓸 것인지가 불확실한 시대이다. 독자의 불확실성은 보이지 않는 시의 중요한 위협 요소이다. 이 문제는 대중문화 속의 시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르트르는 '누구를 위하여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등에 대해 스스로 묻고 그 대답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현대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서준섭 / 경계에의 창조 /' 시인세계' 2009년 가을호


ㅇ 브레히트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첼란은 진실을 말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것은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시는 진실이 표현되(면서 훼손되)는 장소가 아니라,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첼란의 비의적인 언어들은 세상의 말들로부터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철책이다.
요컨데 문제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는 시인의 코기토(cogito)를 '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 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그 의심은 미학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는 도대체가 그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행과 연을 나눈 수필에 머물지 않고 언어를 의심하면서 겨우 한 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형태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불능 등등의 언사들은 그래서 공허하다.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자기 자신을 최선을 다해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 vs전위시' 같은 따분한 구도 이전에 먼저 언어에 대한 태도가 있고, 그 태도가 미학적 진보와 보수를 규정한다.
창비시선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진보적인 시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 내용과 무관하게 미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300번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를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도 그것이다.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낼 줄 아는 뛰어난 서정시들이 십여편 남짓 있어 감동적이었지만, 대다수를 이루는 소위 '민중적 서정시'들에는 언어에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들은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 안에서 너무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하다. 때때로 이 특질들이 독자들에 대한 겸손함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의심은 진실에 대한 경외와 나란히 가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태만은 진실에 대한 오만을 낳는다. 그 오만은 시의 언어, 언술, 형식에 대한 고민을 생략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태도로, 그저 독자에게 삶의 (진실에 미달하는)지혜를 가르치려고만 한다.
그런 시들은 단번에 손쉽게 읽힐 뿐 두번 읽히지 않는다. '힌번 읽기'와 '다시 읽기'사이의 시간이 사유의 시간이다.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시 앞에서 독자는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의 부담을 덜어주는 그런 특질들이 한때는 '민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동일한 것이 '대중주의' 로 비판받게 될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진보주의 / '창작과 비평' 2009년 가을호


ㅇ 쓸데없이 시를 어렵게 하는 수사는 피해야 한다, 복면을 쓰고 남을 미행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맨 월굴이 낫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의 중심을 잡아주는 '사상의 추錘' 이다, 대충 이런 정도입니다.

- 오정국 / 작품을 쓸 때 꼭 지키고자 하는 시창작법 / <시를 사랑하은 사람들>2009년 7-8월호


ㅇ 2000년대의 전통서정시는 '서정'의 새로운 논의에서 회의의 진앙지가 되었다. 이제 시를 쓰는 시인이나 평론가 중 서정과 전통서정을 등가로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서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 회귀하는 쪽으로 지금도 확장 중이다.

범박하지만 '미'의 문제는 시를 쓰는 자, 또는 시를 논하는 자들의 삶의 내력과 직결되어 있다. 유년으로부터 은밀하게 쌓여 온 미에 대한 미감(味感)이나 시라는 것을 배우던 시기에 형성된 원형적인 배움의 총체가 개개인이 느끼는 미의 차별성을 낳는다. 따라서 '서정'은 고정되지 않고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변주되고 시대에 따라서도 그 모양을 달리한다.

한편으로 '서정'에게는, 정확하게 말해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예로부터 막중한 책임의식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시인 스스로 과잉반응한 것인지, 또는 '서정'의 속성상 요구되는 것인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서정'이라는 용어에는 늘상 '인간의 심성을 고양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 식의 주문이 뒤따랐다. 시에 있어 '구원'은 자칫 파쇼적이거나 교조적 문법에 빠지기 쉬운 조심스러운 주제이다. 시인들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시를 쓰던 간에 이같은 명제는 결코 강제될 수도 없고 자율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일종의 '도덕율'은 현대라는 시대의 문학, 그리고 시 전반에서도, '서정' 그 안에서도, 많은 부분 탈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흔히 서정시라고 합의되는 많은 작품에는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나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많은 서정시는 심연의 우울과 어둠 쪽이 아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밝음의 세계 쪽으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고발과 징치의 순간에도 한 줄기 활로 하나를 열어두는 것이 서정시의 미덕이자 특징인 것이다.

- 전형철 / <문학 . 선> 2009년 여름호


ㅇ 시가 존재하고 시에 힘을 실어주는 곳은 지금 - 이곳 즉 현실이다. 현실은 시인에게 끊임없는 생명력과 실물감을 제공한다. 현실을 보면서 그 현실을 표현하는 방법의 조탁이 시의 경우에 더없이 긴요하다. 현실을 본다는 것은 눈에 드러나는 가시적 현상뿐만 아니라 언저리에 숨은 본질이나 함의까지도 간파해 낸다는 뜻이다. 시인은 현실대상에 유별나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미를 새롭게 찾아내려는 의지가 충만해야 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구체적 존재도 현실이고 우리 주위에 노출된 온갖 事象도 현실이며 마음 속에 내재하는 여러 인식이나 관념 역시 현실이다. 이러저러한 상징체계나 실물감을 드러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도 결국 현실의 한 요소가 된다. ......시인 스스로가 기를 축적하여 애쓰지 않고 독자에게 부여하는 최소한의 감동조차 확보하지 못한 시가 난무하는 시대, 개인적인 삶의 흔적과 인상을 단면적인 어휘 몇 행에 담아 시라고 강변하는 시대에, 진실하고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정확히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그 터전 위에 개성적이고 변별력 있는 표현력, 대응력을 길러야 한다. 진부한 일상의 조각을 주워 담기에 바쁘거나, 진정한 교감의 차원에 다다르지 못하는 자연접근, 부재하는 實在애 대한 착각과 맹목적 집착, 그리고 진지성을 결여한 언어실험 등으로 치장하면서 시인의 내공을 게을리 하는 시도 적지 않다.

- 이규식 / <시와 정신> 2009년 여름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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