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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8)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52

ㅇ “요즘 詩의 언어실험, 언어파괴 경계해야 ”

원로 - 중진 시인들 쓴소리 “감동 - 소통 없이 지식으로 써”


“디지털 세대만이 활용할 수 있는 다채로운 소재들로 신선함을 높이고 다양한 실험으로 한국 시의 영역을 확장한 건 인정할 만합니다.”(정진규 시인)

“난해한 외국이론이나 사회과학적 지식에 기댄 실험시가 많아져 시의 본령인 ‘감동과 소통’이 부족해진 것 같아요.”(문학평론가 이경철)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계간 ‘유심’ 편집실에 김남조 이근배 정진규 이가림 서정춘 윤금초 박형준 등 원로 중진 시인 20여 명이 모였다. 문학평론가 이경철 씨가 엮은 시선집 ‘시가 있는 아침’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들은 최근 시단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실험시에 대한 의견을 토로했다.

국내 시단에서는 2000년대 이후 전통 서정시 대신 환상성, 도시서정, 언어실험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적 경향들이 생겨났고 이런 흐름은 ‘미래파’로 명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감각적이면서도 난해한 실험적인 시를 선보인 젊은 시인들은 황병승 김경주 김민정 김행숙 김언 시인 등이다. 이 중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등은 1만 부 전후로 판매되며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다. 최근 이 시인들은 김수영문학상(김경주), 미당문학상(김언) 등 굵직한 문학상을 받으며 다시금 주목의 대상이 됐다.

원로 시인들은 새로운 실험이나 문제제기가 한국 시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했다. 이근배 시인은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실었을 때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이태준은 사표를 늘 갖고 다녔다. 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파격과 진보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실험 그 자체에 매몰되는 현상에는 우려를 내비쳤다. 이 시인은 “당시에는 이상이란 ‘문학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서정주, 정지용, 김영랑 같은 전통적 서정 시인이 또 다른 맥을 유지했다”며 “모국어를 깨뜨리는 언어 실험들이 무작정 유행이 돼 버리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남조 시인도 “최근에 시가 너무 다른 얼굴이 돼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 2010. 1. 18. / 박선희 기자


ㅇ 2000년대의 첫 십년을 넘어서는 지금, 그것(젊은 시인들의 시적 실험)은 새로운 문학적 감성의 출현이라는 세대의 의미를 띠고 있다.
1970년대 産 시인들의 등장은 하나의 문학적 '사건'에 비견할 만하다. 이들이 보여준 낯선 시적 어법과 목소리는, 한편으로는 상투성의 오명을 뒤집어쓴 전통과 현대의 대결로 이해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문학적인 감성구조의 변화와 감각의 쇄신에 힘입어 관습적인 틀을 비틀려는 예술적 충동으로 평가되었다.
지난 100년의 詩史는 復數의 전통에 의해 견인되어 왔다. 이 전통들은 흔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분별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시'를 둘러싼 전통적-동양적인 시학과 현대적-서구적인 시학의 구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문학적 감성의 변화는 주도권이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고 있음을, 대중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문학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부채감 없이 시를 쓰는 시인-주체들의 등장을 의미한다.(전통적인 서정시가 여전히 주류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없진 않지만, 지난 몇 년 시단을 들끓게 했던 미래파 논쟁과, 논쟁 이후에 등장한 신인들의 작품 경향은 현대시의 주류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류란 數의 문제가 아니라 경향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10년의 문학적 성과와 비평적 논점을 세 개의 키워드(감각, 환상, 그로테스크)로 정리하는 건 또 한 번 일반화의 폭력을 저지를 위험이 있지만, 돌이켜보건대 이 개념들이 시단의 화두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의 비평들이 '감각'이라는 개념을 빌어 말하려는 것은 재래의 서정이 고집하고 있는 관습적인 틀을 벗어나려는 몸짓, 그와 동시에 엽기, 환상, 그로테스크, 장광설, 개인적 은어 같은 새로운 목소리와 어법이다. 1990년대 이후 주류로 자리 잡은 생태시의 沒 감각성이고, 넓게는 '서정'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자아와 세계의 일치를 통해 균열을 봉합하려는 태도를 유지해온 현대시 전체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정'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내용이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새롭게 고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감각을 '통해서' 경험된 대상을 형상화하기보다는, '감각' 자체를 언어화하려 한다. 어떤 시편들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독자를 감각의 체험 속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한 편의 시에서 재현의 대상을 찾거나, 특정 구절이 일반적인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종종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는 독자들이 익숙하게 찾아왔던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새로운 목소리와 어법(엽기, 환상, 그로테스트, 장광설, 개인적 은어)은 시에 대한 독자의 전통적인 기대 지평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지점에서 '감각'의 문제는 난해성이나 소통 불가라는 비판에 부딪치게 된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감각'은 느낄 수는 있으나 이해할 수는 업는 것이다. 이 경우 독자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이 특정한 메시지나 의미를 전달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 달리 말하면 감각의 체험을 통한 느낌의 공유를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고봉준 / <서정시학> 2009년 겨울호


ㅇ 시는 무엇 보다 감동을 주는 시, 울림이 있는 시, 파노라마처럼 여운이 있는 시,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비유들로 감칠맛 나는 시, 주제와 알맹이가 있어 씹히는 맛이 있고, 모호함이 아닌 명징함에 오히려 승부를 거는 시 . 사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시들을 써서 문인들 뿐 아니라, 이땅과 세계의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시, 위안이 되고, 깨달음이 되고, 지팡이가 되고, 울부짖음과 함성이 되는 시, 살아서 생동하는 시, 무언가를 꿰뚫고, 깎아내고, 바로잡는 시, 시대를 안고가면서 당대를 영원함과 결속시킨 시 들이 보다 많이 생산되어야 하리라는 바램으로 간절하다.

- 이복현 / <빈터> 홈페이지(2009. 8. 16)에서


ㅇ 한국 모더니즘의 흐름, 특히 신고전주의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등식이 나온다. 분열과 해체, 치열한 모색, 그리고 인식적 완결성이다. 한국의 모더니스트들이 최종 귀결점으로 찾은 인식적 완결성이란 대개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구현되었다. 가령 30년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정지용의 경우가 그러하다. 정지용의 세계가 이미지즘의 세계를 거쳐, 카톨릭시즘, 백록담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세계로 기울어져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일일히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이 같은 경로를 밟아 왔다. 자연은 이들 모더니스트들에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최후의 닫힌 회로였던 것이다.

- 송기한 / <시와 경계> 2009년 가을호


ㅇ 시를 쓰는 것은 언어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우선 뛰어나야 한다. 한국어의 의미와 질감에 대하여 보통사람 이상으로 예리한 감각을 가져야 시인이 될 수 있다. 어째 생각이나 상상력만으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예로: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시어 표현에 개성이 있으면 좋다. / 시어의 개성을 탐구하는 감성적 어법은 좋다. / 자신의 체험을 여과하여 내밀한 언어로 직조하는 솜씨가 두드러지면 좋다. / 시어구사의 수준이 고르지 않는 것, 아포리점적 어구의 반복 사용, 다른 시인이 수없이 노래한 일반적 정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어구사는 안된다.) 새로운 시각으로 상상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할 때 감동을 주는 시가 탄생한다.

막연한 그리움, 신파적인 슬픔의 조장, 고양된 감정 과장, 명상과 관조와 뉘우침과 깨달음, 등은 문학적 학습에 도달하지 못한 '아마츄어'다. 우리는 왜 시인이 되고 싶어한가? 우리에게 시는 과연 무엇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에 대한 물음이 있는 시여야 한다.

- <서정시학> 2009년 겨울호 심사평 요약


ㅇ 심사평 / 예심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이 공통으로 느낀 소회를 먼저 전한다. ‘시의 언어’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 생략된 채 무책임하게 남발되는 ‘산문의 언어’에 대해 우리는 조심스러운 염려를 표하고자 한다. 최근 몇 년간 워낙 시의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올해 응모작들은 특히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산문적 진술이 선택되었다기보다 응집된 시어를 향한 고투를 포기한 안이한 수준의 산문적 언어들이 남발되는 경향이 심했다. 당연히 언어의 긴장은 떨어지고 게다가 비속어와 비문들이 남발되는 경향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는 감정의 일방 배출구가 아님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언어를 함부로 배설하려는 경향은 시 창작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그가 쓰고자 하는 언어와 섬세하게 대결하고 그 언어로부터 사용 승인을 얻어야 하는 자이다. 쓰는 자가 자기 멋대로 언어를 지배하고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언어를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언어로부터의 자재자유함을 획득할 수도 있음을 우리 문청들은 모두 유념했으면 좋겠다. 시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엄격하게 ‘언어’ 자체에 대한 집중을 요하는 장르이고, 시인은 ‘말의 중압감’을 평생 고민하며 평생을 걸고 이 중압감과 대결해나가야 하는 존재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자각과 대결의식이 있어야 이 부박한 반(反)문학적 속도전의 시대에 여전히 시가 태생적 이단으로서의 문학적 반(反)속도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조정권 송찬호 김선우 / 2009년 대산대학생 문학상 심사평에서



ㅇ 생각해보면 우리 시단은, 언어과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일련의 해체 지향 흐름에 떠밀려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고전적이고 본래적인 것 혹은 많은 잉여剩餘들에 의해 사라져가거나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일의 소중함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신화가 필요하고, 시원始原에 대한 열망이 제 목소리를 얻게 마련 아닌가? 결국 시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구이며, 그 동시적 현재화이며, 그 언어적 대리 구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유성호 /<시안> 2009년 겨울호


ㅇ 시는 존재의 죽음에 바쳐진 碑文이다. 존재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감각을 압도하지만 , 예술의 세계에서는 '감각'이 진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존재가 진리를 추앙하듯이 예술은 非진리를 추구한다. 시는 세상의 모든 견고한 것들에게 감각과 감성이라는 비정형의 의상을 입힌다. 그리하여 예술이라는 생성의 틈입에 의해 조각난 폐허 위에서 비로소 시가 시작된다. 이것이 감각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행위라면,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선택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경계에 구멍을 냄으로써 그것을 위기에 빠뜨리는 해체의 전략이 그 하나라면, 낯선 감각을 생산하여 경계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식적 감각과 경쟁시키는 생성의 전략이 다른 하나이다. 물론 예술에서 이 두 개의 행위와 전략은 구분할 수 없는 점이지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해체가 실상 새로운 구성의 형태를 띠며, 새로운 구성 역시 기성의 것을 해체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두 개의 전략이 작동하는 방식은 달라서, 가령 지난 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시 운동이 시에 대한 통념을 해체함으로써 '시적인 것'을 추구하려 했던 부정적인 방식이었다면, 젊은 시인들의 脫서정적 경향은 '해체'라는 부정적 방식과 무관하게 감각의 경계를 돌파하려는, 마치 두더지의 땅굴파기가 견고한 대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재구성을 촉발시키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전자의 정치성이 시에 대한 실체론적 관념을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획득된다면, 후자의 정치성은 시 안에 '시 아닌 것' 이제까지 시라는 관념의 경계 바깥에 존재했던 것들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획득된다. 이 경우 시는 종종 비문(非文/秘文)이 된다,
이 비문(非文/秘文)의 출발점이 비유이다. 시에 있어서 비유는 언어화 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는 장치이고, 대상을 진리가 아닌 감각의 차원에서 접촉하는 과정이다.
말라르메는 언어의 두 가지 상태를 직접적인 언어와 핵심적인 언어로 구분했다. 서술이나 묘사를 통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언어를 침묵에 빠뜨린다. 이 경우 말을 하는 것은 사물, 즉 존재들이다. 반대로 핵심적인 언어는 사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며, 궁극적으로 사물을 사라지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언어는 사물을 재현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항상 도피하고 환기한다. 달리 말하면 사유의 언어가 우리에게 세계를 가리켜보이는 반면, 시의 언어는 사물이나 개념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침묵하게 만드는 언어이다.
데리다가 '시는 언제나 무의미할 수 있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며, 이러한 모험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라고 썼을 때, 그것은 시의 언어 자체가 말하게 하는 발화형태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때 '무의미'란 실제로 아무런 뜻이 없음이 아니라 기존의 체계에서 '의미'로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즉 非文을 의미한다.
시란, 이처럼 기성의 의미체계로는 쉽게 포착될 수 없는 것을 언어와하는 것이며, 기존의 감각으로는 감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의 대상으로 포착하는 활동인데,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와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경계를 확장적으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에서의 타자(성)이란 실상 이것, 다시 말해서 기성의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며, 소수(성)이란 기성의 의미체계와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기 위하여 재배적인 언어를 더듬거리게 만드는 일이다.
'타자'란 '이름 없는 자'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 그것은 신화적으로는 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거나 질서 이전의 카오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종교학적으로는 '존재'의 전제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공동체와 존재의 세계 안에서 '이름 없는 것'은 장소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며, 때문에 실제함에도 불구하고 존재로 셈해지지 않는 유령과 같은 존재임을 의미한다.
적절한 언어롤 지시할 수 없는 것, 감각의 영역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감각적인 것, 그리하여 통상의 가청장치로는 단지 음향으로만 들리는 것, 이것이 바로 타자(성)이다.
시는 이것들을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이 경우 '언어'는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며,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비유가있는 곳에는 이미-항상 언어로 포획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 고봉준 /<서시) 2009년 겨울호

ㅇ 현대는 타자의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주체이기보다는 타자이다. 개성과 다양성 그리고 주체의 욕망이 강조될수록 우리들 각자는 모두 타자가 된다. 나의 욕망은 그런 타자의 욕망일 뿐이며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욕망한다.
이런 타자들의 시대에 일인칭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려는 과거 서정시의 문법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주체가 세계의 보편성을 담지해낼 수 있다는 서정시의 꿈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착오적인 이념에의 부속이거나 귀신을 불러내는 푸닥거리일 뿐이다. 서정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은 타자들의 삶으로 허물어져가고 있는 주체의 파편화된 삶을 절대화하고 그 안에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과 언어에 게재해 있는 타자들의 목소리와 시선을 소거하고 순전한 자기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폐적인 시들이 쓰여진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소통불능, 소통거부의 시들이 다수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황정산 / < 시안> 2009년 겨울호


ㅇ 시가 일대일의 함수는 아니다. 아니 일대일 대응의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대다의 관계를 가지는 상징으로 확장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시적 허공이 필요하다.
시에 새로움이 없다면 그것은 반복적인 넉두리이다. 내용이건 형식이건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주지 못하는 관습적인 문학, 새로움에 적대적인 시선은 문학의 적이다.

- 김병호 / <화요문학> 2009년 가을호


ㅇ (그에게) 풍경은 주체의 바탕이나 배경이 아니다. 풍경 자체가 이미 시적 기호이다. 거기에는 무엇을 더 부여하거나 제거할 필요가 없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를 증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은유가 아니다. 이제 의미는 기표의 심층 혹은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미는 기표를 지배할 수 없다. 오히려 기표가 의미를 환기한다. 모든 기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이다. 은유적 질서는 거부된다. 풍경은 하나의 기표이며, 시인은 이 기표를 기록할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조정의 시간이나 조율의 의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극히 중요한 항목이 아니다. 시적 의도를 최소화함으로써 진정한 풍겨이 드러난다. 이는 (그의) 풍경들이 재현적이지만 어떤 것도 재현하고 있지는 않는 까닭을 알려준다.

신진숙/ <서시> 2009년 겨울호


ㅇ 오랫동안 우리들은 말을 시로 전환시키는 것이 심오한 내용이거나 어떤 표현상의 수사학적 문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심오하거나 공교로운 수사가 없다 하더라도 발화 자체가 시가 되는 말들의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하나의 말을 시로 만드는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은유나 직유나 알레고리와 같은 것이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수사학이 무화되는 이 지점이 바로 언어를 시로 만드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

-함돈균/ <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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