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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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말이 되지 못한 글, 시가 되지 못한 말 / 강인한

오선민 2011. 1. 4. 23:06

말이 되지 못한 글, 시가 되지 못한 말

—이제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으며

 

   강 인 한

 

 

 

   첫 번째 광주비엔날레에서였다고 기억합니다. 전시실 실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었는데 몇 작품은 실외에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누구의 작품인지 작품 제목도 잊었습니다만 하나의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걸레 같은 무언가를 적당히 이름 붙여 실외에 설치해 놓은 외국 작가의 설치작품을 한 주일쯤 지난 뒤 주변 청소를 하던 부주의한 청소부가 그만 쓰레기로 알고 청소해버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작가도 청소부도 피차 국제적인 망신(?)이었지요. 한편 생각해 보면 당연한 판단이며 합당한 대우가 아니었겠는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여기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유명한 「샘」이 생각납니다. 또한 백남준의 말 “예술은 사기다.”라는 선언도 떠오릅니다.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의 예술가(화가도 조각가도 아니라 예술가라는 어정쩡한 말)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습니다. 「샘」은 뒤샹이 반(反)예술개념에 입각해 고안해낸 레디메이드의 하나입니다. 이는 예술가가 기성품을 선택하여 물리적 전환(변기를 90° 회전시킨 채 화장실에서 전시장으로)과 논리적 전환(변기에 '샘'이라는 명패를 달고 서명을 한 것)을 거쳐 예술작품으로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이는 하나의 아이디어이지 그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은 아닐 것입니다. 백남준의 저 말은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게 아니라 이를테면 뒤샹의 아이디어를 포함한 일련의 아방가르드에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으로 비쳐집니다. 전위예술이 단지 실험적이며 낯설고 참신하다는 이유로 예술로 성급하게 우대 받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실험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속성을 띱니다. 그러므로 실험 그 자체를 성급하게 대단한 성공이라고 나팔 부는 일은 지극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니의 등단작(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루」에 대해서는 애당초 반응이 엇갈렸습니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라는 심사위원들(최승호, 황인숙)의 평을 받은 그 시를 직접 읽어보기로 합니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페루」전문

 

 

   화자는 쌍둥이언니와 함께 머리를 빗을 때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은 갈래머리’에서 아마도 먼 나라 ‘페루’ 사람들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시집의 표지를 그 언니가 그려줬고, 사진도 언니가 찍어줬다 합니다.) 이어서 화자는 ‘고산지대’와 ‘라마’를 차례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말은 혈통적으로 한국인이 아니지만 한국인으로 귀화한 요즘의 다문화가족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지나치게 장황한 산문시는 당돌하리만치 비시적인 작품입니다. 심사위원이 달랐으면 '아마도 낙선'되었을 작품입니다. 자동기술법에 의한 이미지의 연속을 따라 적어간 작품일 뿐 이게 좋은 ‘시’로서의 존재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말하기엔 많이 미흡합니다. 단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일 뿐입니다.

   ‘말의 재미를 즐기는’ 듯한 시인의 태도는 이제니 시의 행보 전체에 가장 분명한 암시가 됩니다. 어렵사리 찾아낸 그녀의 아이디는 ‘funnypen'이었습니다. 등단한 지 3년도 되지 않아서 성급하게 펴낸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funny'라는 말이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뜻은 사전에 “익살맞은, 웃기는, 우스운(comical); 재미있는(amus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니의 시가 지향하는 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지향의 설정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시집의 해설자로 권혁웅 시인을 선정한 것도 어쩌면 이제니의 지향점이 ‘재미있는 시, 웃기는 시, 익살맞은 시’라는 판단의 근거가 될 법합니다.

    최근 정말 재미있는 시, 혹은 말의 재미를 보여주는 시를 쓴 이들로는 『마징가 계보학』『소문들』의 권혁웅 시인, 『호텔 타셀의 돼지들』의 오은 시인,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의 서효인 시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시는, 쓰는 시인 자신들도 즐겁고 재미있게 시를 썼으리라고 상상되며 그 시들을 읽는 독자들도 또한 즐겁고 재미있게 읽습니다. 충분한 소통이 가능하기에 이런 행복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쓰는 사람 자신만 즐겁고 재미있을 뿐 그 시들을 읽는 독자는 다만 어리둥절하고 곤혹스럽다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로서의 시를 가정해 봅시다. 그건 시인이 일방적으로 시라고 선언하고 독자와의 소통을 막아버린, 대단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시인이 의도적으로 자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인은 자기 시를 누군가 읽어주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거기서 이해하고 공감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읽어보기로 합시다.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비처럼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요롱이는 검은색과 검은색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마침표를 잃어버린 슬픔. 양팔을 껴야만 하는 외로움.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요롱이는 말한다」부분

 

 

   아마도 시인은 이 시를 써놓고 나서 낄낄거리며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들 요롱이가 무언지 알겠어? 요롱요롱하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겠어? 아, 고소해라. 이와 같이 혼자 써놓고 혼자 재미있어서 즐기는 시. 여기에는 소통이라는 게 무시되어 있습니다. 잠깐 이쯤에서 신예 평론가 조연정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제 이제니는 “무의미한 습관” 같은 말과 “결연한 의지”(「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로 결별하고 말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일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원시의 말은 주술이었으며 수행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원시의 말에는 비유도, 반어도, 역설도 없었다. 증오의 대상을 향해 ‘죽어라’ 말해 놓고 정말로 그가 죽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원시인이다. 이제니의 후렴구들은 이 같은 원시인의 말을 닮았다. 그녀의 시에서 소리와 의미가 분리된다는 말은 더 정확히 말하면 소리와 의미의 자의적 결합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더 강력한 결합을 위한 전제가 된다. 소리와 의미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혼연일체가 되는 지점, 이제니의 말놀이는 이처럼 순진무구한 상태를 지향한다.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한다」)라고 그녀가 적을 때 이것은 비단 어떤 리듬을 추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요롱요롱’ 반복함으로써 뭔지도 모를 ‘요롱이’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서 모퉁이라고 발음하고 모퉁이라고 발음하면서 모퉁이를 돈다”(「모퉁이를 돌다」)라고 쓸 때도,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지 마 세면 셀수록 늘어날 거야”(검버섯)라고 쓸 때도 이제니는 언어의 신비로운 주술성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조연정, 「말이 말이 되려는 찰나」(문장 웹진 11월호)에서

  

   조연정이 말한 ‘후렴구’라는 것이 어떤 주술적 힘을 발휘하는 목적으로 쓰인다고 하지만 이제니에게 오면 그것은 단지 ‘모호성’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그 자체가 시인 혼자 즐기기 위한 자위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읽고 나서 도무지 내가 무얼 읽었는지 알쏭달쏭하고 몽롱한 가운데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건 유명한 시인이 쓴 아주 훌륭한 시야. 이걸 모르는 내가 수치스러운 게야. 아, 나는 너무나 가방끈이 짧아서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슬퍼. 또한 시를 공부하는 지망생들이나 정통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조차 조롱하며 열패감을 심어주는 말도 아닌 시. 시집 속의 시들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런 가운데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같이 말장난이 아니라 진짜 시가 된 작품도 몇 편 있긴 합니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반은 쑥색이고 반은 곤색이다

      쑥색과 곤색의 접합점은 성홍열 같은 선홍색

 

      열두살 이후로 농담이 입에 배었다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손톱 끝에도

      주황색 양파자루 속엔 어제의 열매들

      양파가 익어가는 속도로 너는 울었지

 

      눈을 감아도 선홍색이 보이면

      다시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너무나 멀리 있지만 아마도 아프리카

      나는 하룻밤 사이에도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아마도 아프리카」전문

 

 

   시집 속에서 비교적 시의 꼴을 그나마 제대로 갖춘 작품 중의 하나가 될 이 시는 시집의 표제작입니다. 이 시에서 눈살 찌푸려지게 드러나는 두 가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수줍어서 말끝을 흐려버린, 아니면 지능이 낮아 말의 중동을 잘라버린 듯한 말투는 어쩔 수 없는 비문(非文)입니다.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조금” 이것을 시적 허용이라거나 시의 함축적 표현이라고 하기엔 너무 염치없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말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기본 상식의 결여입니다. ‘곤색’이라는 말은 ‘감색, 진남색’으로 대체해야 할 일본말 찌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터무니없이 시인이 많다 보니 ‘하늘색’을 ‘소라색’이라고 버젓이 시에 쓰고도 그게 잘못임을 모르는 몰상식한 시인도 있긴 합니다. 요즘 대중가요에는 마구잡이로 반토막의 영어를 겉멋으로 삽입한 가사를 적지 아니 볼 수 있습니다. 일본말, 토막 영어 따위를 무분별하게 시에 쓰는 것을 앞서가는 우리말의 다문화 수용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예컨대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페루’), 혹은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그러듯 막 대해줘도 좋을 텐데”(‘분홍 설탕 코끼리’), 혹은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 잘못이 아니어도 요롱요롱 용서를 구하고 싶다”(‘요롱이는 말한다’)라고 말할 때 이런 정서들은 우리 모두의 것이죠. 대화가 헛돈다는 느낌, 예의 바른 태도가 때론 쓸쓸하다는 느낌, 잘못도 없이 용서를 빌고 싶은 느낌.

이 시인은 대체로 천진하다가 이런 식으로 기척도 없이 문득 어른의 표정을 짓습니다. 아이에게서 그런 표정을 읽을 때 우리가 ‘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듯이, 이런 구절들과 만날 때면 이 시인의 천진함마저 어쩐지 심오해집니다.

     —신형철「최선을 다해 천진합니다」, 한겨레21(2010. 11. 12)에서

 

   “화가는 색을, 음악가는 음을,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죠. 그럴 때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평론가 신형철은 이제니의 천진성을 시인으로서의 최고의 미덕인 양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천진하기 때문에 이상야릇한 말들을 만들어서 통통 튕기며 가지고 노는 것일까요? 아움, 자퐁, 뵈뵈, 홀리, 밋딤, 라이라, 요롱…… (‘자퐁’은 일본Japan에 대한 프랑스식 발음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등의 해괴한 말과 소리와 비문들을 뒤범벅으로 반죽해서 만든 시를, 괴상한 말들을 우리말 사랑에서 나온 새말의 발명으로 봐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외면한 그건 우리말의 사랑 아닌 파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는 '유희적인 말놀이, 무의미한 언술의 나열' 의 집합체입니다. 말장난, 시인 혼자 즐기는 말놀이, 텅 빈 언어의 껍질로 노는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여 이제 시를 쓰고자 하는 젊은 지망생들에게 이 시집 속의 시편들이 저만큼 앞서가는 훌륭한 시인 양 잘못 인식될까 적잖이 우려됩니다.

   백남준의 용기 있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 오래전 광주비엔날레의 어느 청소부의 용감한(?) 판단과 행동에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 2010. 11. 27 )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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