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송찬호의 「촛불」감상 / 이진명 본문
송찬호의 「촛불」감상 / 이진명
촛불
송찬호(1959~ )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 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
우리 시에 누가 파랗게 언 가난한 두 손을 비벼 촛불을 만들어낸 적 있던가. 어깨를 촛대로, 팔을 양초로 만들어낸 적 있던가. 시 전체에 내장돼 전해지는 드높은 순결의식. 존재의 온전히 헐벗음 자체, 바닥이 된 절실함에 감정이입이 되어 시에서처럼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나의 형상을 수차례 그리곤 했다.
빈손에 촛불이 켜지는 기적이 시에서 일어나는 걸 보며 희망과 사랑의 창조, 시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았다.
이진명 <시인>
'시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좋은 시에 나타나는 상징(은유)의 예 /신재한 (0) | 2011.04.05 |
---|---|
장옥관의 「날계란 한 판…」감상 / 이진명 (0) | 2011.01.14 |
김영승의 「반성 10」감상 / 손택수 (0) | 2011.01.14 |
[스크랩] 타나토스를 관통하는 뜨겁고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 / 정수경 (0) | 2011.01.04 |
[스크랩] 이형기의 「복어」감상 / 손택수 (0) | 2011.01.04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