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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오정국의 「금서(禁書」평설 / 홍일표

오선민 2011. 6. 21. 21:58

오정국의 「금서(禁書」평설 / 홍일표

 

 

금서(禁書)

 

   오정국

 

 

불탄 집의 잿가루에서 꺼내 온

이 문장은

번갯불의 타버린 혀이다 산 계곡의 얼음장이 갈라터지는 밤,

 

저수지 저쪽 기슭에서 뻗쳐오던 힘과 이쪽에서 뻗어가던 힘이

맞부딪힌 자리, 순식간에 얼음 밑바닥까지 칼금처럼 새겨지는

이 문장은

 

번갯불의 섬광으로 눈먼 자의 주술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이 길이 등 뒤에서 흘러왔음을 알고 있으니,

죽음의 혀를 불태우고 일어선

이 문장은

 

비단꽃무늬를 얻었다가 비단꽃무늬로 허물어진 뱀의 허물이다

제 살가죽을 가시처럼 찢고 솟아오른

이 문장은

 

살모사처럼 제 어미를 물어 죽였다 그 이야기를

무심코 거기서 끝냈던 것인데 눈이 그쳤다 비로소

얼어붙은 입, 그리하여 이 문장은

 

누대(累代)에 걸쳐 완성된 피의 철갑(鐵甲)이며

끓어오르다 물러터진 진흙의 후계자이다 눈 내리는 벌판에서 나는

그 어떤 말도 들은 바 없는데,

 

내 이렇게 깜깜하게 눈멀어, 아무래도 이 문장은

빛이 나에게 준 상처, 빛의 검(劍)이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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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언어의 육체

 

 

   직방으로 가자. 그의 시에는 힘이 있다. 탄탄한 언어의 육체가 있다. 가볍고 사소한 감각의 현란한 무늬가 아니라 진득한 삶의 중력과 팽팽한 긴장이 시종 시를 압도하고 있다. 시에서 힘이 느껴진다는 것은 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갔다는 것, 거짓말하지 않고 장난치지 않고 매우 진중하게 삶의 얼룩을 깊이 있게 읽어냈다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의 자세는 엄중하고 정직하다. 그의 어느 시를 읽어도 선이 굵고 둔중한 울림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몽 같은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생의 비극적 풍경 속에서 캐낸 시의 광맥들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오정국의 시다.

   ‘번갯불의 타버린 혀’ ‘칼금처럼 새겨지는 이 문장’을 보라. 그 문장은 바로 ‘죽음의 혀를 불태우고 일어선’ 문장이다. 또한 ‘누대(累代)에 걸쳐 완성된 피의 철갑(鐵甲)’이며 고투를 통해서 얻어낸 생금 같은 삶의 진실이다.

   내 이렇게 깜깜하게 눈멀어, 아무래도 이 문장은

   빛이 나에게 준 상처, 빛의 검(劍)이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제 살가죽을 가시처럼 찢고 솟아오른' 한 자루 ‘빛의 검’을 번쩍 눈앞에 내놓는다. 귀한 선물이다. 거저 가져가지 마시라. 혹여 손을 베일지도 모르고 휘황한 빛에 눈멀지도 모르는 일. 비루하고 팍팍한 삶의 굽이굽이에서 이 한 자루 칼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망설일 것이 없을 터.

   함부로 움켜쥘 수 없는 문장, 한 순간 독자의 가슴을 스윽 베고 지나가는 ‘금서’ 를 옷깃을 여미고 거듭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예리한 감각과 묵직한 사유가 잘 버무려져 농익은 시가 바로 ‘금서’이다.

   어느덧 저녁이다. 시인이 사는 정릉에도 어둠이 올 것이고 그 어둠과 대적하며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올곧게 시의 길을 걸어가는 이가 오정국 시인이다. 가을이 되면 그의 새 시집을 만나게 될 것이고, 거기에는 깊이와 밀도를 지닌 또 다른 삶의 진경이 펼쳐질 것이다. 시와 사람이 하나인 오정국 시인과 한 시대를 건너는 우리는 행복한 삶들이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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