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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유안진의 「겁난다」감상 / 권혁웅

오선민 2011. 6. 23. 23:42

유안진의 「겁난다」감상 / 권혁웅

 

 

겁난다

 

   유안진(1941~ )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呼訴)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口號)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도 도마뱀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 나간다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肉筆)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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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시 위의 낙지는 일필휘지(一筆揮之)다. 어찌나 명필인지 숨이 탁 막힌다. 불판 위의 장어는 격문을 쓴다. 몸에 바른 갈색 소스가 전부 이토(泥土)다. 투사가 따로 없다. 도마뱀은 전갈에게 꼬리를 떼 준다. 전갈(全蝎)에게 준 전갈(傳喝), 포스트잇이다. 흘림체 글씨가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땅속의 지렁이는 한 일 자밖에 못 쓴다. 두 번 쓰면 두 이, 세 번 쓰면 석 삼, 그 위를 가로지르면 임금 왕 자다. 배로 쓴 글이어서, 글자 하나 쓰려면 황토 종이를 다 먹어 치워야 한다. 민달팽이는 제가 쓴 글 위에 눈물을 뿌린다. 반짝이는 상소문이다. 연애를 해도 잘 했을 것이다. 이게 다 육필이란다. 그걸 찾아낸 시인의 안목이 더 대단하다. 토닥토닥 자판을 두드리는 시인의 손, 위로의 손길이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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