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고진하, 「닭의 하안거(夏安居)」감상 / 김선우 본문

시 비평

고진하, 「닭의 하안거(夏安居)」감상 / 김선우

오선민 2011. 8. 16. 08:59

고진하, 「닭의 하안거(夏安居)」감상 / 김선우

 

 

     닭의 하안거(夏安居)

 

                                            고진하

  

 

 

이 오뉴월 염천에 우리 집 암탉 두 마리가 알을 품었다

한 둥우리 속에 두 마리가 알도 없는데

낳는 족족 다 꺼내 먹어버려 알도 없는데

 

없는 알을 품고

없는 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이 무더위를 견디느라 헉헉거린다

 

닭대가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부르진 말아다오

시인인 나도 더러는

뾰족한 착상의 알도 없으면서

 

없는 알을 품고

없는 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뭘 좀 낳으려고 끙끙거릴 때가 있나니

 

닭대가리!

 

제발 그렇게 부르진 말아다오

그러고 싶어 그러고 싶어 꼭 그러는 게 아니니!

  

◆ 고진하 -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에 시를 바료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프란체스코의 새들』『우주배꼽』『얼음수도원』『수탉』『거룩한 낭비』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영혼의 정원사』『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강원작가상을 수상함.

 

◆ 출전_ 『거룩한 낭비』(뿔)

  

------------------------------------------------------------------------------------------------------------------

안거는 출가한 수행자가 일정기간 외출하지 않고 한군데 머물며 독하게 공부에 정진하는 기간과 행위를 말하지요. 한국에선 보통 하안거, 동안거를 합니다만, 일상의 모든 시간과 장소가 실은 안거의 장이기도 한 거겠지요. 스스로 깨어있는 정신이 안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겠는데요. 여기, 닭들의 일상에서 수행의 삶을 보는 시인의 안목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알을 빼앗기고 없는 알을 열심히 품는 닭의 행위가 ‘닭대가리’라는 말로 간단히 비하될 성질의 것인가요, 라고 시인은 너무 무겁지 않은 퍽 유쾌한 자세로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어리석은 듯 보이는 닭과 시인은 실은 한통속. 시인이 낮아지는 게 아니라 닭이 귀해지는 방식으로 지상의 생명들의 수평적 가치를 구현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 그래요, ‘닭대가리’라는 말은 쓰지 않아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말복이었군요. 여름내 기운 없는 인간들의 보양을 위해 살신해 준 닭들이여 고맙습니다.

김선우 (시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