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본문

그림으로 읽는 철학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오선민 2011. 11. 24. 09:17

사랑보다 명예가 중요한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도 겉치레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비난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모독하면서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는, 마음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발표되었을 당시(1863),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작품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저 그림을 불편해하고 증오했습니다. 마네는 오명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왜 저 그림으로 파리가 발칵 뒤집혔는지 이해되지 않습니까? 신사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인! 나는 생각합니다. 저 '풀밭 위의 식사'나 '올랭피아' 같은 마네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들로만 보기엔 너무나 매혹적이라고.

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식사 > ,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08×264.5㎝, 오르세 미술관, 파리

 

생각해보면 과거의 화가들은 누드의 여신을 많이 그렸습니다. 여신의 누드는 되는데, 여인의 누드는 안 된다며 분노하고 야단을 치는 그 경직되고 격앙된 태도 속에 들어있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부끄러워하는 문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문명의 편견들을 떠안고 살면 삶은 안전하지요? 그러나 매력도 없습니다.

찬찬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여인의 표정을 살펴보십시오. 여인의 표정은 단정하지도 않지만 도발적이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천연덕스럽지요. 그럼에도 저 여인을 도발적이라 느끼게 하는 건 우리가 가진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관념들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짓의 옷, 겉치레의 옷이 없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그래놓고 우리가 불편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잘못했다고 겉치레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거지요.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요? 잘 차려입은 저 남자들은 세속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너무나 세속적인 남자들이라기보다, 그래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사들일 수 있겠다고. 그들은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않고, 사회적 편견의 힘으로 여자를 재단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여자를 대하는 성숙한 저 태도가 마네의 태도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물과 숲, 남과 여, 어두운 양복과 빛나는 피부, 네 사람의 구도가 안정적이고도 시원하지 않나요?

사실 편견을 내려놓고 보면 저 자세는 더없이 편안한 자세 아닙니까? 비스듬히 기대앉아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무릎을 직각으로 세우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얹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얼짱 각도로 바라보는 이를 자신감 있게 바라보고 있는 누드의 여자, 모두들 편안하지 않으면 취할 수 없는 자세들입니다.

저 자세들의 오리지널이 있다지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에 나오는 바다의 신들의 자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가야할 황금사과를 두고 아테나와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어지러운 세상엔 관심이 없다는 듯 바다의 신들이 모여 앉아 대화하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러니 저 자세는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일일랑은 남의 일처럼 모르는 척 물려놓고 그들만의 평화를 만들어 누릴 수 있는 자들의 여유로운 자세인 겁니다.

마네는 여신이 아닌 여인을 그렸습니다. 우아하거나 순수하거나 요염하거나 어쨌든 완벽한 자태로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현실감 없는 여신이 아니라 다리가 짧아도, 뱃살이 있어도 함께 살며 사랑하며 이별할 수 있는 인생을 그린 것입니다. 여신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 있는 여인은 모든 것을 살아있는 풍경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풍가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담박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예쁜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고 기분 좋은 긴장감을 살짝만 불러일으키는 멋진 남자들도 같이. 맨발이, 목욕이 무례가 되지 않는 친구와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으면서 자연스럽게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겉치레 없이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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