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얼룩말 감정//최문자 본문
얼룩말 감정 외
최문자
재가 된 그를
북쪽으로 가는 거친 파도 위에 뿌렸지만
그는 익사하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죽음은 아무래도
내게 잘못 보내주신 낯선 짐승
도심 어느 골목에 멍하니 서있는 얼룩말 한 마리
그가 없는 밤이 지나가면
밤이 왔다
우리만 모두 살아있는 새벽
내다버린 유품들이 비를 맞았다
죽음은
한 장을 넘기면 또 한 장의 털이 다른 가슴
무턱대고 감정을 만드는 모조 같은 하양과 검정
부스럭거리며 살아서 온다
전에는 닳도록 시만 썼는데
시에서 한 사람을 빼는 일
안보일 때까지 깜빡거리는 흑백의 잔등이다
검었다 하얘졌다 하는 심장 사이
하는 수 없이 숫자로 가는
눈물투성이 초침 사이
내일 켜질 불빛은 또 다른 검정
내가 아닌 그도 아닌
이것은 어떤 잠일까
스칠 때마다 슬픈 소리가 났다
세상은 언제부터
나를 마구 읽어내는 격렬한 독자가 되었나
꽃구경
최문자
1
꽃은 몇 겹으로 일어나는 슬픔을 가졌으니 푸른 들개의 눈을 달고 들개처럼 울고 싶었는지 몰라 저 불안전한 꽃잎 하나 만으로 죽음도 환할 수 있으니 저 얇은 찢어짐 하나 가지고 우울한 우물을 파낼 수 있으니 이게 바람 대신 울어주는 창호지 문인지 몰라 꽃은 죽고 나무만 살아있으니 나무속에 끓고 있던 눈물의 일부일지 몰라 검은 점으로 부서졌다가 재가 되는 꽃 마지막 뼈일지 몰라 밤새 꽃을 내다 버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죽은 동그라미의 질감으로 바람에게 끌려가는 소리 간지러웠던 피 모두 흘려버리고 매운 꽃나무 뿌리를 다시 찾아가는 순간일지 몰라
2
꽃들이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공허한 내 등뼈를 구경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꽃이 없어졌을까 언제부터 이곳에 이처럼 딱딱한 굵은 슬픔 한 줄 그어져 있을까
3
어떤 봄날에 꽃 보러 가는데 불현듯 배가 고팠다 배고프면 위험한데 깜깜한 짐승이 되는데 눈 먼 푸른 박쥐처럼 더러운 바닥에도 엎드리는데 허기져도 꽃은 여전히 꽃이 되고 있었다 떨릴 때에도 모른 채하고 하루씩 하루씩 꽃이 되고 있었다
4
그동안 산맥과 구름 사이에 너무나 많은 꽃잎을 날렸다 어떤 슬픔인지도 모르는 그 걸 멈추려고 거기다 너무나 많은 못을 박았다
계간 『시와 표현』 2014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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