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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남진우

오선민 2015. 4. 22. 10:31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남진우


이 밤
대지 밑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운다

지하를 흐르는 검은 물줄기가
누워 있는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몸 가득히 어두운 말을 풀어놓은 시각
죽은 자의 입에 물린 은전의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찬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 보면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차가운 달의 심장

대지 저 밑에서
죽은 자들의 손톱과 머리칼이 소리없이 자라듯
나는 이 밤
그들의 말이 두근대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어둠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보고 있다


 

- 시집『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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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어떻게 살든 누구나 마지막 결말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석가모니가 자식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살려달라는 한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마을 집집마다 찾아가 사람이 죽어나간 적이 없는 집에서 공양을 얻어와 봐라. 그러면 아이를 살려줄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집안은 없으며 석가모니도 예수도 죽음만은 어쩌지 못했다. 장자는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두려울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고 했지만 보통사람들에게 죽음은 가장 낯설고 두려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람이 있긴 해도 누구도 죽어본 경험은 없고 아무도 그 죽음을 진술해주지 못한다. 또한 죽음은 항상 미지의 공포이면서 때때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호머의 일리아스에는 불사신인줄만 알았던 아킬레스의 영웅적인 인생이 나약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화살 한 방으로 막을 내린다. 장례식장에서 아킬레스의 시신이 화장을 위해 제단 위에 누워있고, 그의 양 눈에 황금색 주화 두 개가 놓여진다. 눈 위에 동전 두 개를 올려놓는 것은 고대 유대의 풍습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스틱스 강이 흐르고,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죽은 영혼을 배에 태워 저승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이때 뱃삯으로 은화 한 닢을 받았는데, 망자의 입 속에 넣는 풍습이 있었다. 그 ‘은전의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옛날에는 누군가 죽으면 ‘별똥별 하나 내 이마에 금을 그으며 떨어’진다고 했다.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꾸면 누군가 죽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꾼 게 아니라 실제로 생니 하나가 부러졌다. 2주 전 지난 4월 8일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아이들 어미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부음을 들었다. 김포의 살던 아파트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타살도 자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망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지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다. 국과수의 부검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현장 정황상 토사곽란 상태에서 토사물이 기도를 막아 사망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입관 전 시신은 부어있었고 검붉은 반점이 가슴과 등에 넓게 포진되어 있었다. 작은아이는 꼼꼼하게 제 어미의 시신을 확인하였으나 큰 아이는 흘낏 한번 보고는 외면하는 듯했다. 내게 이 죽음은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물증이기도 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지만 혼자 살다 죽었으니 아이들 외가에서는 내가 배우자로 초상을 치러주길 바랬다. 아이들이 상주 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만 나로선 난처하고 난감했다. 처제는 살았을 적 언니가 했던 말을 언급하면서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좋은 게 좋다고 선심 쓰듯 나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둘레에 부고할 입장도 아니거니와 졸지에 당한 터라 형편조차 여의치 않았다. 마침 다른 일로 통화가 된 한 지인에게 사정을 말했던 것이 ‘작가회의’문자로 알려졌고 긴가민가하는 안부전화와 몇몇 분들로부터는 염치없게도 정성어린 조의까지 받았지만 애초의 의사는 아니었다. 일을 치루고 뒷일을 수습하는 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많아졌으나 글은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죽음이 내게서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것이 호시탐탐 내 손을 잡으려 들거나 어깨를 툭 치거나 자주 옷깃을 스치며 지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둠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보’면서 다만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내 두려움을 회피할 밖에.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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