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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 찾기의 시학 --이영춘의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시와사람, 2014, 겨울 본문

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길 찾기의 시학 --이영춘의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시와사람, 2014, 겨울

오선민 2015. 4. 10. 09:45

이시집을 주목한다

 

길 찾기의 시학

-이영춘의 『노자의 무덤을 가다』, 서정시학

-김상섭의 『無情說法』, 시와사람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길 위에서 길을 찾다 -이영춘 시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

이영춘 시인의 시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를 읽다보면 길 위에 선 나그네가 보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나그네가 되어 길을 간다. 자아실현을 위하여 강물처럼 발원지를 떠나 흘러가는 강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물은 온 몸이 가시덤불을 지나온 짐승처럼 상처투성이지만 보다 깊어진다.

그런데 왜 시인은 노자의 무덤을 찾아갔을까, 오래 전에 죽은 노인의 무덤을 찾아갔을까?

시집을 통독하고 나면 시인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이 시집에 드러난 서사들이 이영춘 시인의 체험적인 것이고 보면 『노자의 무덤을 가다』는 그가 지금 지나는 길이 어디쯤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은 이영춘 시인의 삶을 압축한 앨범이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길 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노년에 이르고 있는 시인의 실존을 다시금 뒤돌아보는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이 인간존재의 의미를 질문하고 대답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는 측면에서, 함부로 살아가는 자, 자신의 삶을 방치한 자, 자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너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느냐?’ 하고 묻는 질문서가 될 것이다.

길을 찾아 길을 묻고 길을 가는 시인의 여정을 뒤따라가 본다.

 

강물을 따라 강둑길을 걷는다

강물은 내려가고 나는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 어느 지점 돌무덤 아래 멈춰 서서

물소리 듣는다

 

목숨 가진 것들은 다 울며 가는 것인가

 

강둑에 엎드려 울던 풀잎도 풀벌레도 모두

제 키 낮춰 제 몸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나는 내가 없는 빈 몸으로 간다

 

달빛이 강물에 누워 어른대듯

내 가는 길 암호로 일렁인다

 

어느 꼭지점에 이르러야

내 가야할 길

저 적멸에 드는 물의 길 갈 수 있을까

 

언뜻언뜻 무릎 꿇고 앉은 싯다르타의 굽은 등

스쳐 간다

강물을 향해 적멸에 든

저 큰 불기둥 얼굴 하나

 

나는 그 앞에 오래오래 공수로 서서

눈먼 짐승으로 운다

  -이영춘, 「길을 묻다」 전문

 

“강물”은 실존을 비유하는 상징이다. 순리에 따른 “강물은 내려가고 나는 올라간다” 화자는 강물을 역행하고 있다. “강둑에 엎드려 울던 풀잎도 풀벌레도 모두/제 키 낮춰 제 몸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풀잎”도 “풀벌레”도 순리에 따르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적멸에 드는 물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러면서 “언뜻언뜻 무릎 꿇고 앉은 싯다르타의 굽은 등/스쳐 간다” 그리고 “강물을 향해 적멸에 든/저 큰 불기둥 얼굴 하나”를 본다. 강물처럼 순리에 순응하여 깨달음의 세계, 적멸의 세계에 든 싯다르타의 얼굴을 본 것이다. 적멸에 이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며 화자는 “그 앞에 오래오래 공수로 서서/눈먼 짐승으로 운다” 화자는 울고 있지만 늦게나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이다.

시인은 이번에는 노자의 무덤을 찾아간다. 역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공(空)의 그릇,

 

살아 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그 누구의 그림자일까?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이영춘, 「노자의 무덤을 가다」 전문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공수래공수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지상은 빈 그릇” 하나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이다. 성현의 한 사람인 노자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그릇” 하나 뿐이다. 그런데 그 그릇은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이 “바람이 숨쉬다 돌아가는 허공의 크기”일 뿐이다. 화자가 노자의 무덤에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사상이 아니다. 그저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빈 그릇’은 이영춘 시인이 얻고자 하는 세계이다. 여전히 길 위를 가고 있는 시인은 또 다시 붓다에게 길을 묻고 있다.

 

저 강물 속에 잠들지 못하는 불기둥 돌기 하나

누구의 영혼 한 조각 이슬방울로 떠도는 편재(遍在)인가

편재의 그 넋으로 침묵에 이르는 지상의 주재자 그대,

 

강물 일렁이는 저문 강 창가에 등 기대고 서서 나는

내, 가는 길을 그대에게 묻는다.

 

장원의 숲속에서 한때 방탕하였던 그대 업보의 흔적,

그 천형의 흔적, 붉은 화인 등줄기에 꾹꾹 찍으며

그대는 도의 길, 무위자연의 공(空)으로 이르는가

 

얼마쯤 더 가야 그대의 가슴 저 밑바닥에 닿을 수 있을까

보리수 고행의 열매, 브하가비띠의 적멸로 뚝뚝 흐르는데

 

나는 이쪽 강 하구에서

이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붉은 죄수의 쇠사슬 목에 걸고

절름절름 세상길을 가고 있다

 

붓다여! 그대 잠들지 못하는 불기둥 침묵의 돌기 하나

동방의 강 하류 어느 억겁의 중간쯤에서

그대 돌아갈 무위자연의 긴 강, 그 푸른 심장에

나는 매일 밤 그대 등 뒤에 서서 촛불 한 자루씩 불사르며

슈냐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이영춘, 「저 강, 붓다의 침묵」 전문 

 

이영춘의 새 시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에서 가장 주목되는 시편은 제1부에 수록된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이 투사된 작품들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대로 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길을 묻고 있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空’의 세계이다. 사람은 일생동안 그릇을 탐한다. 밥을 위해 탐욕스럽게 살다가 마지막 가는 길에 남는 것은 빈 그릇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그야말로 빈 그릇일 수도 있고 충만한 그릇일 수도 있다. 충만한 그릇일수록 빈 그릇이 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노자의 무덤에 가다』는 이영춘 시인의 요즘 생각의 중심에는 저물녘 빛나는 텅 빈 그릇, 그러나 충만한 그릇에 이르고자 하는 ‘空’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불교적 사유를 통해 길찾기 -김상섭 시집 『無情說法』

김상섭 시인의 『無情說法』은 불교적 사유가 깃든 시집이다. 그 동안 발표한 그의 시집들 또한 불교적 세계관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상섭 시인은 경쟁을 일삼으며 물질과 자본을 탐하며 자연을 재화적 가치로 인식하는 인간의 탐욕이 충천하는 오늘을 카오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평등하며, 무정물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의 뿌리가 하나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마침내 적멸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삶을 그 길로 안내하고 있다. 적멸의 세계에 들기 위해 김상섭 시인은 ‘하심(下心)’을 통해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서구의 이성론적인 사고로는 하심할 수 없으며 적멸의 세계에 들 수 없음을 말하는데, 오늘날 인간의 삶을 이끄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러한 김상섭 시인의 시세계가 전지구적으로 고심하고 있는 생명, 환경에 대한 관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김상섭 시인이 바라보는 인간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들여다 보도록 한다.

 

카오스가 울부짖는 혼돈의 질서 속에

오늘도

여정은 계속 된다

 

어제가 오늘이며

내일이 오늘인

윤회의 경계에서

 

속진에 흠뻑젖은 무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걷고 있다

-김상섭, 「오늘의 언어」 전문

 

이 작품에서 ‘카오스’는 인간세계의 혼돈을 지적한다. 이는 김상섭 시인이 오늘의 인간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말해준다. “어제가 오늘이며/ 내일이 오늘인/ 윤회의 경계”란 시인의 삶을 의미한다. 연기론에 의하면 이번 생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번 생과 다음 생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며, 이번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서는 또다른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 결정되므로 앞뒤 생의 경계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지금 “오늘도/ 여정의 행진은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속진에 흠뻑 젖은 무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걷고 있다”고 말한다. 모순과 부조리로 얼룩진 세상의 번뇌 속에서 살아온 화자 자신 삶을 성찰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화자는 “혼자서 걷고 있”는 것인데, ‘혼자’라는 언표에는 번뇌를 물리치고 무상(無想)의 경지에 이르고자하는 화자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다.

김상섭 시인의 연기론적인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띈다.

 

새의 눈물을 볼 수 없듯이

꽃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그대의 心곡에 흐르는 물소리 또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계절풍을 느낄 수 있듯이

꽃숲의 황홀을 느낄 수 있듯이

 

우리는, 본래 청정하게 빛나는

우주의 별이기에

서로를 느낄 수가 있다

-김상섭, 「우주의 별이기에」 전문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물의 종이 살고 있지만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알 수 없고, 나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듯이 “새의 눈물을 볼 수 없”다. 새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꽃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대의 心곡에 흐르는 물소리 또한” 당연히 들을 수 없다. 그렇지만 “계절풍을 느낄 수 있”고 “꽃숲의 황홀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본래 청정하게 빛나는/ 우주의 별이기에/ 서로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만물이 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우주의 삼라만상은 본래 별이었으며 별에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삼라만상은 한 뿌리를 둔 형제라고도 할 수 있다. 연기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메시지대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연기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칠흑의 어둠이 내리면, 창유리에

태곳적 옛 임이

광명을 발산하는 여의주를 흔들며 손짓한다

 

은밀히 간직했던 비상의 나래를 펴고

내밀한 그곳까지 날아든다

 

안온한 오온(五蘊)*이 心혼을 감싼채

마음이 다 해버린 그 자리 그 곳에서

백팔무 수놓으며 조요로히 활공한다

-김상섭, 「百八舞」 전문

 

“칠흑의 어둠이 내리면, 창유리에/ 태곳적 옛 임이/ 광명을 발산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이다. 해가 기울면 달이 차오르고 이윽고 달이 지면 해가 또다시 떠오른다. 이 불변의 영원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은밀히 간직했던 비상의 나래를 펴고/ 내밀한 그곳까지 날아든다” 속속들이 해나 달이 칠흑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안온한 오온(五蘊)이 心혼을 감싼”다. 여기에서 “안온한 오온이 심혼을 감”싸는 존재는 수행자이다. 아니 수행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오온(五蘊)이란’ 불교 근본사상의 하나로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다섯가지를 말함인데, 색(色)은 육체, 수(受)는 감각, 상(想)은 상상(想像), 행(行)은 마음의 작용, 식(識)은 의식을 뜻한다. “오온이 심혼을 감싼 채/ 마음이 다해버린 그 자리 그곳에서/ 백팔무 수놓으며 조요로히 활공”하는 것은 그 중심에 ‘유심(唯心)’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알다시피 유심은 우주의 모든 존재는 마음의 표현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존재하는 것이 없고 마음은 만물의 본체로써 유일한 실재(實在)를 말한다. 즉 “마음이 다해버린” 지점, 즉 적멸(寂滅)에 들었음을 뜻한다. 인간세계의 108가지의 번뇌를 잊기 위해 백팔무를 추는 것처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하는 우주의 질서는 인간이 번뇌를 잊고자 백팔무를 추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김상섭 시인은 시를 통해 수행자적인 삶을 통해 구하려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심(下心)에 이르는 것이다. 이 하심은 이영춘 시인이 바라보는 지점인 ‘공(空)’의 세계, 즉 적멸에 이르는 길과 같은 것으로, 김상섭 시인은 실천적인 삶을 통해 ‘空’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불교적 세계관이 깃든 그의 시는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나무의 정신
글쓴이 : 시와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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