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본문

시 비평

[스크랩]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오선민 2015. 9. 10. 14:24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 시집『용연향』(나남출판, 2001)

..............................................................

 

 ‘사랑은 없다. 다만 사랑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라고 썼다가/ 사랑은 있다. 사랑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고쳐 쓴다.’ 김정란 시인의 <사랑은 있다>란 짧은 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는 시인이 사랑의 회복과 재무장을 염원하는 이 시는 2000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란 대목에서야 비로소 ‘프리다 칼로’를 두고 쓴 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프리다의 삶과 <나의 탄생>이 짙게 어른거린다.

 

 시인은 한때 세인의 입에 숱하게 오르내렸다. 자신의 직장인 상지대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안티조선운동에 앞장을 섰다. 그땐 그들로부터 ‘저 빨갱이 년’이란 욕도 들었다. 한 문예지에 ‘문단이 문학성보다는 언론플레이를 통한 상업성 확보에만 급급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문학권력’논쟁의 불을 지핀 ‘싸움닭’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 모 시인과의 ‘싸움’에서 온갖 모욕을 다 겪기도 했다. 모두 힘겹고 위험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신념대로 행동하는 진보적 여성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편견만 걷어내면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 지식인이다.

 

 그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감동적이고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진보성의 위선이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 문단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었다. 이 시에서 이해하고 믿고 이루고자 하는 사랑은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우리 사회의 절실한 새 희망이다. 그의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상처투성이의 내면에 대한 애잔한 아픔이라든가, 아픈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주조로 한 그의 평론들을 환기한다면 역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과 생명의 신비에 그 사랑의 촉수가 닿아있다.

 

 다만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란 부분에서 그동안 ‘마초’들이 휘두른 칼에 수없이 마음의 살을 베여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팠을 그 상흔이 느껴진다. 한 여성 지식인이 ‘중세 마녀’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독고다이’로 견디기는 버겁고 위험했을 소용돌이의 한복판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고, 그 말대로 살려고 했기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임을 자위했을 것이며, 꼿꼿하게 ‘죽어야 산다’며 ‘에코페미니즘’을 선창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자연과 여성에게 자행되는 지배와 억압을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모두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지배문화 속에서 생겨났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생태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상호연관성이 에코페미니즘으로 연결되었고, 이 시도 같은 선상에서의 새로운 여성상, 그 사랑의 의미로 읽힌다. 아울러 문학의 힘으로 영혼을 고양시키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구현하리란 굳센 믿음도 느껴진다. 썩은 뒤에야 만들어지는 동물성 향료 ‘용현향’의 존재갱신처럼.

 

 

권순진

 

Blueprints Of The Heart / David London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