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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1974/ 이시영

오선민 2015. 9. 10. 14:24

 

 

1974/ 이시영

 

 

항구 남쪽에서도 귀신이 나왔다고 한다

해안통 쪽에서 나타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가는

더벅머리 셋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볼일이 있다고 재빨리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다

 

광주(光州)에서도 대낮에 여우가 나왔다고 한다

온몸에 불을 켜고 충장로를 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우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빠져 달아나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소리낸 사람은 없다

 

영등포(永登浦)에서도 여자 둘이 나왔다고 한다

야근을 하고 돌아가는 새벽 철둑길에서

여자 둘을 본 여자들은 집에 와

문을 걸어닫고 사흘 낮밤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은 없다

 

용산(龍山)우체국 옆길에서도

붕대를 감은 대머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어깨들을 끼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제끼며 돌아갔는데

아무도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없다

삼각지를 따라 부른 용산 술꾼들은

땅을 치며 하룻밤을 새우고 왔는데

이튿날부터 술을 끊었다고

술꾼 중의 1인이 쉬쉬하며 내게 전해왔다

 

- 시집 『만월』(창작과비평사,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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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유신시대에 선포된 긴급조치 1호 위반죄로 구속되었다가 면소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국가가 형사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법원의 결정이 4년 전 있었다. 이는 긴급조치 1호가 대법원 전원합의 판결에 의해 위헌 무효가 된 것에 근거하였다.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도 같은 판결을 받았다. 즉, 일부 경제와 관련된 조항 외에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긴급조치 자체가 사실상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4호에는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그 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는 조항도 있다.

 

 학교를 며칠 땡땡이쳐도 강제퇴학을 당할 수 있었던 당시 분위기였고, 술집에서 유신을 비판하고 국가원수를 씹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교회 사찰 언론사에도 ‘사복’이 들락거렸으며, 집에서조차 자식이 유신을 비방할라치면 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누가 갑자기 사라져도, 사라졌다가 실어증에 걸려 되돌아와도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고 말을 들은 사람도 없다. 나도 공부는 뒷전이었다. 하지만 소심하게 매일 술만 마셔댔을 뿐 불끈 쥔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거나 촛불을 켜고 기도하지는 않았다. 가끔 울화통이 터지면 강가에 나가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를 소리쳐 불렀다.     

 

 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인 이시영 시인은 1974년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에 서명하고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이후 김지하 석방을 위해 결성된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암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그 후 1989년《창작과비평》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유신 철폐를 위해, 구속 문인과 양심수 석방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동자의 살 권리를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시대의 암울함을 고발한 이 시를 읽노라면 지난 2년반 동안 박근혜정권이 초래한 대립과 갈등, 그 자화상에 대한 우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국민과 언론 등에 대한 고소 고발의 남발은 입에다 재갈을 물리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국가기관 혹은 고위공직자에 의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등의 민·형사 소송은 사실상 승소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겁주기의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지난 대선 무렵부터 못마땅하게 여겼을 문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의 희망이 담긴 신문광고를 냈다는 이유로 당시 작가회의 사무처장이 경찰서로 불려가는 등 수모를 겪었다. 이에 젊은 작가들의 항의와 시위가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김별아 작가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들이 문제 삼은 내용은 ‘독재자’,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라는 표현이라 들었다며 자신은 그들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한다고 못을 박고서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생물학적 이치를 떠나 작가라는 존재와 문학예술에 대한 옹호”이며, “작가는 애초에 스스로를 불신하고 시대와 불화하는 존재다. 아무러한 공(公)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가장 사(私)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쥐를 쥐라 못하고 닭을 닭이라 못하고 개를 개라 못한다면, 어찌 꽃을 꽃이라 하고 별을 별이라 하고 바람을 바람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적었다.  

 

  이 무렵 안도현 시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 국정원 직원 댓글 의혹과 관련 ‘트위트’를 ‘리트위트’했다는 이유로 작가 공지영이 고발되어 수서경찰서에 출석하기도 했다. 이에 공지영은 “국정원 직원이 업무와 상관없는 댓글을 단 것이 사실로 드러났는데, 내 행위가 어떻게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트위터 활동에 대한 탄압”이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며칠 전 공지영 작가의 페이스북에서 희안한 포스팅을 보았다. 지난 13년 간 사형폐지운동을 벌이면서 법무부 교정위원으로 활동해온 그인데, 교정담당 신부님의 재위촉 신청이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것 다 접어두고 오만함과 천박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니 1974년 유신시절의 프레임으로 급격히 회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어찌 지울 수 있을까.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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