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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발 (외 2편)/ 권기만

오선민 2015. 9. 23. 17:46

(외 2편)

 

   권기만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동거

 

 

 

얼굴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에는

다섯 마리 토끼가 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깡충 깡깡충 뛰어다닌다

내가 우울하면 쫄쫄쫄 굶는다

 

다섯 마리 토끼가 뛰어다니는 얼굴을 보는 건

즐겁다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있는 대화 중이거나 사랑하고 있을 때다

소곤소곤은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다

 

한겨울에는 토끼도 어쩔 수 없이

말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봄이 오고

사방에서 꽃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소풍을 간다

꽃 한 송이마다 한아름의 미소가 사는 걸 알아보는 건

토끼다 입 다물고 있어도 봄이 지나고 나면

살금살금 미소가 살쪄 있다

 

소곤소곤 조곤조곤을 뜯다가 어른 토끼들은

구름 속으로 이사를 간다 큰소리는 토끼가

제일 싫어하는 풀이다 아이들 말은 토끼의 발

버짐 핀 듯 얼굴 왼쪽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새끼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콩나물

 

 

 

곧추세운 코브라 대가리

이빨 잃고도 기죽지 않는

단단한 고요의 음계

정지 화면

멈칫, 하면 먹힌다

그게 그가 진화시킨 포획법

반쯤 먹힌 손으로

모가지째 뽑아 끓는 물에 넣는다

몸뚱이가 허물어져도 풀어지지 않는 독기

진간장 고춧가루로 절이고 버무려도

말짱 쌩쌩

조금도 공손치 않다

고요를 포획하고 어둠마저 포획했음인가

입에 넣는 때를 기다려

이빨 사이로 대가리 들이민다

몸은 버리고 머리로 살아남는 게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머리 전부로 눈 동그랗게 치뜬다

이런 독기 하나 있느냐고

 

 

                      —시집『발 달린 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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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만 / 1959년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 시집『발 달린 벌』.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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