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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음악이 있는 시)슈나우저를 읽다/김은호

오선민 2015. 9. 10. 14:25

 

슈나우저 강아지 '토토'와 고양이 '나비'가 함께 찍은 사진.

 IMF와 함께 우리 집에 온  '토토'는 2010년 12월 19일 새벽에 죽었다.

 

 

슈나우저를 읽다/김은호

 

 

텃밭 가장자리를 곡괭이로 파서 열고 흰 무명천에 책을 싸서 묻는다

삽으로 흙을 뿌려 덮으며 흰머리멧새 울음소리도 몇 송이 얹혀준다

오랫동안 읽었던 부드럽고 따듯한 이야기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사방팔방 무너져 내려 집에 쌀 팔 돈조차 없던 때

길에서 주워온 슈나우저* 한 권

 

검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표지에 반짝반짝 두 개의 별이 박힌 책

첫 장부터 끝까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풍성한 수염 출렁거리던

가끔 붉은 혀로 세상을 핥아주거나 컹컹 꾸짖을 줄도 아는

슈나우저는 따뜻한 난로가 부록으로 묶인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쾌한 문장들 쏟아지고

우리 집 웃음소리 굴뚝처럼 높아갔다

    

책과 독자 사이를 오가던 수많은 사연 잿빛으로 물든 날

우리 함께 고통을 이겨냈어요이별의 장을 앞발로 버티며

너덜너덜 노래하던 책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온 통증이 죽음까지 내달았다

열심히 나를 뒤적거렸지만 슈나우저 한 권 찾아내지 못했다

일상의 책장에 꽂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슈나우저만도 못한 파본破本이었다

 

 

*슈나우저(schnauzer) : 독일 원산 반려견의 한 품종

 

 

모짜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k.622  2악장 외

출처 : 시와소금
글쓴이 : 시인과 농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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