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본문

좋은 시 감상

[스크랩] 너무 아픈 사랑/ 류근

오선민 2017. 1. 9. 11:20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


  21년 전 19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이 자기 집 거실 난간에서 목을 매어달기 불과 7시간 전, 모 케이블방송에서 공연을 하였고, 그때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당시 김광석은 가수생활 11년차였으며, 라이브콘서트 1천회 기록을 세운 뒤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음악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자괴감과 허탈감에 시달렸다. 그로인해 조울증세가 심해졌고, 급기야 충동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일반에게 알려진 자살의 동기이다. 하지만 자살을 선택한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의 분위기와 연결 지어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란 관측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죽은 그날에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내와 다정히 맥주 4병을 나눠 마실 정도로 가정적인 문제는 별로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이 곡을 붙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자신이 쓴 가사가 아니라 당시 ‘류근’이란 덜 알려진 젊은 시인이 작시한 노랫말이었다. 노랫말에 배경이 있다면 그것은 김광석이 아니라 류근의 사연이었을 것이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으로,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며 노래하는 모습이 애절하다. 여성 버전인 양현경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후벼 판다.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사랑의 패자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우는 노랫말이다. 류근은 군 복무시절 사귀던 여자를 선배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전방GOP근무를 하면서 아침이면 매일 ‘오늘은 죽어야지’ 결심했다가 저녁노을이 밀려오면 ‘하루만 더 살아보자’ 마음 고쳐먹기를 몇 달이나 거듭했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 노래에는 당시 쓰라린 실패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고, ‘먼 전생에’ 그가 쓴 ‘유서’로 남았다. 류근은 김광석 보다 두 살 아래로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다. 그는 시집의 날개 등에서 프로필을 꼭 그렇게 밝힌다. 문경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충주에서 모국어를 습득했다는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이후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다가 등단 18년 만인 지난 2010년에 첫 시집을 냈다. 그리고 ‘시바’와 ‘조낸’이란 종결어미와 함께 페이스북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이제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을 알 정도로 걸쭉해졌고,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임을 터득할 만큼 노련해졌다. 그는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4년 전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란 산문집도 냈다. 그의 인기와 명성이 가져다준 영역 확장으로 공영방송의 한 역사 프로그램에도 고정출연하고 있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김광석이 일정 부분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시보다 노래 한 곡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현실에서 그들은 한때 죽이 맞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운이 좋은 존재였다. 이 시점에서 그들의 공통점을 굳이 말하자면 뒤늦게까지 너무 짜릿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다. 시바 조낸.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시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보다 독한 눈물 / 박 인 환  (0) 2017.02.08
[스크랩] 까뮈/ 이기철  (0) 2017.01.09
12월의 기도 / 목필균  (0) 2016.12.09
춤추는 달팽이 / 고진하  (0) 2016.07.15
[스크랩] 앨리스의 사물들 / 서안나  (0) 2016.05.3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