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해변의 묘지를 지나며 외 1편 본문
해변의 묘지를 지나며 외 1편
황경숙
깊고 푸른 거울 속 터널
적도 무풍대를 지난다
숨어있던 구름이
호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밤
지나온 봄을 시집 속에서 만났다
태풍보다 두려운, 바람 없는 거울은 견고한 벽
새의 깃털에라도 묻어 날아가고 싶은데
수직으로만 불던 바람이 잠잠하다
한 치 일렁임 없는,
들여다보면 차오름도 이지러짐도 없는 달빛
날짜 변경선을 넘으며 어제의 내가
거울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깨진 금 사이 감춘 빙하처럼 크레바스에 갇혀
고여 있지 않는 고요함으로 자유로운
폴 발레리의 영혼에
내 말절골을 풀어 묶는다
이윽고 바람이 무릎을 편다
바람꽃 뿌옇게 일어나는 거울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젖은 신문지로 꾹꾹 눌러 닦는다
적도 무풍대에 바람이 분다
길고 딱딱한 그림자 같은 내 울음소리 들린다
* 폴 발레리의「해변의 묘지」에서
쎄라티데*
비 오는 날이면 허리에 지느러미가 자라는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다
모여들던 먹구름
21층 안마시술소 유리창을
후두득 툭툭 두드린다
가늠하지 못하고 내려간 바닥은
수심 270m
견딜수 없는 수압과 어둠
부릅뜬 눈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차라리 눈을 감는다
잘 벼린 비늘과 세상의 기미를 감지하는 지느러미로
바다의 혈맥, 아픈 부위를 짚어내고 풀어준다
경직된 근육을 주무르고 만지며 각진 바다의 모서리들이 순해질 때
한 겹 한 겹 파도를 차고 오르며
파고에 익숙해진 몸과 손은 환한 눈이 된다
바닥에도 문이 있다
제 몸집 보다 큰 입으로 먹어버린 불운
자궁에서 벗어나오는 빛이 되어
청동 방패처럼 견고한 바닥의 수면
밖으로 나갈 푸른 문이 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운명
다음 생에도 물고기로 태어나기 위해
나는 눈을 잃어야 한다
* 바다의 바닥에 사는 심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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